필요하다,라는 말
집에 들어서자마자 유난히 TV소리가 거슬렸다. 소리를 줄여달라고 말할까 했지만 어차피 방문을 닫으면 크게 방해되지도 않고, 딱히 집중을 요할 무엇을 할 예정도 아니었기에 방으로 직행했다. 문을 살짝 열어놓은 채 옷 갈아입고 있으니 애틋함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고 온갖 폼을 다잡은 듯 힘주어 말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난 네가 필요해. 너에게도 내가 필요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 아, 고백하는 장면! 시청자들이 모두 숨죽인 채 차가운 도시남자가 컨셉인 그의 무심한 듯 쉬크한 고백에 대리만족을 느껴야하는 순간 아닌가. 그런데 단어 하나가 거슬린다. '필요' 사랑 고백에 있어 '필요하다'는 말은 전혀 낭만적이지 않다. '좋아해' 라거나 '사귀자' 라는 말이 차라리 낫겠다. 방송작가들은 이러한 말이 너무 진부하다 생각하여 그나마 상대적으로 덜 사용하는 '필요'라는 단어를 쓴 걸까. 사물도 아니고, 누군가를 캐스팅하거나 스카우트하는 것도 아니고, 관계에 있어 '필요'라는 말은 어쩐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상대를 끌어들이는 느낌일까. 뭐 결국 사랑도 일종의 욕망이긴 하지만, '필요'로서 채워지거나 하는 종류 따위는 아니지 않는가. 더 이상 좋아하거나 사랑하지 않아서 헤어질 순 있어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으니 헤어지자고 하진 않지 않나. 이렇게 말하고 보니 무슨 막장드라마 대사 같다. 관계에 있어서 '필요'라는 단어가 사용되니 자연스럽게 '버리다'라는 말도 사용하는 게 아닐까. 더 이상 필요하지 않으니 버린다. 사전을 찾아보니 '버리다'의 뜻 중엔 '직접 깊은 관계가 있는 사람과의 사이를 끊고 돌보지 아니하다'라는 뜻도 있긴 하지만.., 어쩐지 폭력적이고 잔인하고 서글픈 느낌이다. 사랑은 필요충분조건만으로 성립되는 게 아니다.
앞으로 누군가에게 고백 받을 일이 또 생긴다면 절대 듣고 싶지 않은 고백이다. 그런데 불현듯 스치는 장면 하나. 나도 저런 말을 한 적이 있었던가? 왠지 있었을 것 같은 이 싸한 느낌은 뭘까. 고백보단 붙잡음의 상항이었을 테지. 분명 말하면서도 이런 오글거리는 대사를 하다니, 그 정도로 간절한 것도 아니면서, 뭐 이러 생각을 했던 거 같고, 그 순간 말하는 내 자신이 너무 어색하다고 느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 개꿈을 데자뷰처럼 느끼는 것이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