휑하고 횅하고 휑뎅그렁하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집에, 누군가를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집에서 요즘 지내고 있다. 약 한 달 동안이지만. 아침 빨리 먹으라고 잔소리 하는 이 없다. 화장실에 들어가면 흰 머리를 뽑느라 삼십 분이고 한 시간이고 나오지 않는 이 때문에 화장도 지우지 못하고 잠 들 일 없다. 방문을 덜컥 열고 요란한 청소기를 밀며 들어오는 이도 없다. 샤워한 뒤 수건으로 물기 꾹꾹 눌러 닦고 재빨리 옷을 입지 않아도 된다. 집 안을 마음껏 돌아다니며 자연 건조한다. 방 안에 틀어박혀 방문 꼭꼭 닫고 지내지 않아도 된다. 거실 바닥에 엎드려 원고 교정하고, 소파에 앉아 책을 읽는다. 허리가 좀 아프다 싶으면 노트북 들고 식탁에 앉아 글을 쓴다. 몸을 틀면 커다란 거실 창이 보인다. 창밖 풍경은 그다지 아름답지 않지만, 보이는 건 아파트뿐이지만 먼 산(아파트) 바라보며 멍 때리긴 좋다.
어제는 비가 올 모양인지 아침부터 흐렸지만, 요 며칠 계속 되던 무더위가 한 풀 꺾인 듯 했다. 책 한 권 들고 어슬렁어슬렁 동네산보하다가 근처 카페에서 치아바타 샌드위치와 커피로 아침을 먹었다. 이른 시간이라 카페에 손님은 나 말고 한 테이블뿐. 가벼운 재즈가 흐르는 카페 구석에 앉아 책을 읽고 있으니 왠지 내 삶의 질이 높아진 것 같았다. 소소한 오전 시간 보내며 '삶의 질'을 생각하는 내가 살짝 우습기도 했지만, 사람은 일상의 작은 변화와 여유 속에서 자기만족하며 살아가는 게 아닌가 싶었다. 신발 신으면서 아침도 안 먹고 나간다는 잔소리를 듣지 않는 것만으로도 평소와는 다른 하루의 시작이니 말이다.
저녁엔 진열대에 있는 양주라도 꺼내 마셔볼까 했지만 얼음도 없고, 안주도 마땅찮아 관두었다. 보는 사람도 없지만 혼자 똥 폼 잡는 거 같아 괜히 민망했다. 맥주 한 캔과 소시지를 사왔다. 드라마에서 혼자 양주나 와인을 따라 마시는 장면은 종종 볼 수 있는데, 왜 맥주 한 캔 따서 벌컥벌컥 들이마시는 장면은 없는 걸까. 치이이이이치이 타아악! 맥주 캔 따는 소리와 꿀꺽꿀꺽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소리만 잘 잡혀도 맥주회사는 광고에 돈 쓸 필요 없을 거 같은데. 내가 보지 못한 건가? 아니면 내가 본 드라마는 여름을 뺀 나머지 계절에만 방영했던 걸까? (사실 요 몇 년간 TV를 제대로 본 적도 없다만) 확실히 맥주는 여름이 되면 특히 더 생각나고 마시게 되는 술이기도 하고.
예전에 이곳에서 지낼 땐 새벽 5시부터 저녁 10시까지 늘 소란스러웠다. 부엌에서 달그락 거리는 소리,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하루 종일 틀어놓는 볼륨 15이상의 TV소리 때문에. 그래서 그런지 집이 유난히 넓고 휑하게 느껴진다. TV는 보지 않고, 평소에도 혼자 조용히 지내는 편인데 장소가 바뀌어서 그런가. 아니면 그동안 지내던 곳, 예전에 혼자 살던 곳 모두 좁아터지기 직전이었기 때문일까.
이 집엔 시계가 참 많다. 이상할 정도로 많다. 그동안 사거나 선물 받은 시계란 시계는 모조리 꺼내어 걸어두었나 보다. 각 방마다 벽시계가 하나씩 걸려있고, 거실에는 벽시계 하나, 벽시계지만 서랍장 위에 올려놓은 구 벽시계 하나, 부엌에 두 개, 화장실에 하나씩. 1초, 또 1초, 초침 가는 소리 요란하다. 나 이렇게 잘 움직이고 있으니 초 단위로 내 흐름에 신경 쓰라며 경각심이라도 심어주려는 듯이. 아주 경박하게 자기 존재 증명을 하고 있는 듯하다. 어젯밤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침대 위에 걸린 벽시계 건전지를 빼 버렸다. 그러나 방문을 열어놓고 자니 소용없더군. 거실 벽시계여 네 초침 소리가 제일 요란쿠나.
그리고 잠시 다른 곳에서 지내고 있는 나의 개. 개는 가끔 심통나면 방 어딘가에 몰래 오줌을 쌌다. 나는 지린내가 나기 시작하면 방마다 돌아다니며 오줌 싼 곳 찾아내 세척제 뿌려 물티슈로 닦기 바빴다. 지금은 냄새가 날 리 없는 데도 희미하게 콧속으로 지린내가 흘러들어오는 것이...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어딘가에 오줌 자국 누우렇게 눌러 붙어 있나보다. 왜일까, 그 곳을 적극적으로 찾아내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