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덜 멍했던
2013 09 25
1.
세미나 발제문 아주 엉망으로 써갔다. 2주 전 최악의 상태에서 쓴 걸 그대로 가져갔으니. 하아. 그런데 당분간은 계속 상태가 좋지 않을 듯 하다. 책 앞에 쓰여 있는 '분석 분석 분석 파이팅' 이라는 말이 무색하군.
2.
<마지막 사중주>를 보러 씨네큐브까지 갔다가 발걸음을 돌렸다. 비 한 번 내리더니 완연한 가을 날씨! 영화의 내용을 떠나 <마지막 사중주>를 본다는 것만으로 나의 기분은 충분히 우중충해있었기에, 차라리 광합성하며 돌아다니자 싶었다.
3.
북촌방향. 마음에 드는 신발도 신어보고, 옷도 입어 보았다. 그동안 편해도 너어무 편한 스타일의 옷만 입고 지냈다. 직장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다 보니 정장의 필요성도, 특별히 예의를 갖춘(?) 옷차림에 대한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고. 최근 1년 동안 제대로 된 옷을 산 적이 없다는 걸 최근에야 깨달았다.
가격이 싸거나 마음에 든다고 이것저것 쉽게 사재는 타입도 아니고,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옷을 찾기가 힘들었다. 옷들이 다 고만고만해보였다. 내가 남달라 보여야 하고, 무조건 튀는 스타일을 추구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유행에 맞춰 입고 다니는 것도,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여성스러운 스타일도 싫었기에. 또 쇼핑은 엄청난 시간과 체력을 요하는 일이므로 한 번 하려면 큰 맘 먹어야 했다. '쇼핑'이라는 단 하나의 목적으로 외출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더라. 신경 쓸 일을 늘리고 싶지 않았다는 게 핑계라면 핑계였을까. 사실 난상지목불가앙難上之木不可仰이라고, 마음을 비우고자 쇼핑 자체를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오르지 못할 나무, 아니 사지 못할 옷이라면 어떠랴. 입어보기라도 하면서 나에게 어울리는 옷과 괜찮은 브랜드를 알게 되는 것도 꽤 재미있는 일이구나 싶었다. 내 체형에 대해서도 알게 되고, 한동안 거부감을 느꼈던 스타일이 나한테 꽤 잘 어울린다는 것도 알았고(그 스타일을 딱히 뭐라 설명해야할지는 모르겠지만).
4.
처음 삼청동 구경 왔을 땐, 내가 정말 서울 안 개구리도 아닌 송파구 안 개구리라는 걸 알았다. 삼청동 같은 동네에 살 수 있다면 좁아터진 옥탑방이라도 좋겠구나 싶었다. 정취, 운치, 풍치, 아취, 멋 -
몇 년 뒤, 삼청동이 '핫 플레이스'로 뜨기 시작할 무렵엔 줄을 서서 거닐어야 했다. 그리고 곳곳에 들어서기 시작한 그놈의 프랜차이즈 매장들. 노오란색 간판이 맘에 들었던, 나중에 꼭 저 곳에서 조금 오래 머무르며 커피마시고 책 읽어야지 했던 북 카페 또한 사라지고 없더라. (그때 지나가면서 찍었던 사진이 컴퓨터에 남아 있었다)
5.
부암동. 예전에 우연히 발견한 뒤 다음에 꼭 다시 와야지, 했던 옷가게는 오늘도 역시나 "CLOSE" 늘, 항상, 문이 닫혀있었다. 처음 그곳에 갔을 때 오픈한 상태였던 게 신기할 정도.
6.
서촌으로 내려왔다. 머뭇머뭇, 두리번두리번, 느릿느릿, 어물쩡어물쩡, 그렇게 머물다 왔다.
7.
내가 좋아하는 밤하늘에 떠있는 흰 구름.
깜깜한 밤하늘에서 흰 구름이 보이는 날엔, 그래 너네 사라지지 않고 거기 있었구나 하고 안심이 된달까 -
+
그는 완벽하지 않고,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둘은 앞으로도 완벽해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당신을 적어도 한번 웃게 해 줄 수 있다면, 두 번 생각하게 해준다면, 남의 실수를 인정할 정도로 인간적이라면 그를 꼭 붙들고 당신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주세요. 시를 인용해 매혹하거나 매순간 당신을 생각하진 못하겠지만 당신이 깨뜨릴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의 일부를 당신에게 줄 겁니다. 상처주지 말고 바꾸려 하지 말고 줄 수 있는 것 이상을 기대하지도 마세요. 분석하지 마세요. 그냥 행복하게 해주면 웃고, 화나게 하면 소리 지르고, 없으면 그리워하세요. 사랑이 있을 때 열심히 사랑하세요. 왜냐면 완벽한 남자는 존재하지 않지만, 당신에게 완벽한 그 남자는 항상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죠. - 밥 말리
며칠 전 연애상담 요청한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내가 그랬다. '잘' 해준다는 게 뭘까? 연애할 때 '잘' 해주려고 하면 안 되는 것 같아. 그건 순전히 나의 기준에서, 나의 만족으로 하는 것 아닐까? 그냥 최대한 서로를 불행하게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끄덕끄덕하는 친구를 보고 있으니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홍상수 영화에 나오는 인물이라도 된 것 같았다. 참 말은 번지르르르 잘 한다, 잘 해. 내가 그랬다. 나는 늘 ‘잘’ 해주려고 했다. 과연 상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제대로 생각해본 적은 있었던 걸까?
"그 무렵 나는 당신에 대한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당신이 아닌 것들로 당신에 대해 말하고 싶었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사진으로까지 남겨둔 당신의 비누로, 당신의 세라믹 과도로, 보라색 폴라 니트를 입었을 때 드러나는 당신의 어깨선으로, 당신이 설거지를 하는 방식으로, 당신이 작업할 때 앉아있는 자세로, 당신의 책과 CD, 뭐 그런 것들로 말이에요.
나는 늘 당신이 궁금했습니다. 단지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관심을 넘어 한 인간으로서 당신이 궁금하고 신기하고 재미있고 놀라웠지요. (……) 내 마음껏 당신을 표현해보고 싶었습니다. 그건 나만 할 수 있는 거라는, 어쩌면 조금은 오만한 생각을 했던 거 같네요. 그냥 궁금하고 신기하고 재미있고 놀라워하며 지내면 될 것을 어떻게 해서든 나의 언어로 당신을 설명하고 싶어 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