虛
1.
아침에 눈을 뜨면 그 침실의 작은 창문에는 언제나 정확한 하늘이 있었다. 어쩌면 강박적인 하늘이었다. 강박적인 밝음 그리고 어두움. 오늘 아침 그 창문에는 엷디엷은, 뿌옇고 뿌연 흑갈색빛 하늘이 있었다. 저녁 늦게까지 흩어지지 않았던 안개 때문이었을까. 가만히 누워 빗소리를 듣다가 이건 정말이지 가을 빗소리구나, 생각했다. 아스팔트 바닥에 축축하게 눌러 붙은 나뭇잎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 차마 손은 잡지 못하고 차가운 발가락 끝을 살짝 기대어본다.
2.
토요일이긴 하지만 비도 오고. 사람 많진 않겠지?
응 비도 오는데 그렇지 않을까?
아니면 비가 와서 오히려 사람이 많을까? 비가 오는 것과 사람의 많고 적음이 상관있을까?
아침에 눈 떴을 때 비 내리는 거 보면 나가려다가도 한 번 더 생각하게 되지 않...나? 나만 그런가?
, 조금 쓸모없는 이야기를 나누어본다.
아점이라고 하기엔 애매한, 점저라고 하기엔 너무 이른. 점점저일까, 점점점저일까, 점점점점저일까. 점점점저 정도가 좋겠다.
, 조금 더 쓸모없는 이야기를 나누어본다.
3.
차 안에서 노르웨이의 색소포니스트 얀 가바렉과 힐리어드 앙상블이 함께한 앨범<Officium>을 들었다. 그러고 보니 올해는 여러모로 색소폰 재발견의 해였다. 사실 색소폰 소리라 하면 카바레의 끈적거림만 떠올리는 정도였으니 재발견이라고 할 순 없겠지만. 아침부터 비 온다고 울적해 있던 어느 날, k가 보내준 <Antiphone Blues> 앨범을 들으며 색소폰의 고유한 음색에 그대로 빠져들었고(끈적거림조차 매력으로 다가오는), 양평에서 서울로 가는 차 안에서 <Yasuaki shimizu&Saxophonettes-Cello suites> 앨범을 들으며 색소폰과 바흐에게 깊이 매혹당해 버렸지.
그레고리 성가와 같은 교회 선율과 색소폰은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조합이었는데, <Officium>을 들으며 신비로움을 넘어서는 숭고한 목소리와 색소폰 소리의 결합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음악에 대해 '설명'하는 건 나에게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오래 듣진 못했다. 차 안은 이미 밖에서 스며든 축축하고 무거운 공기로 가득했는데 음악도 거기에 무게를 얹었기에. 그도 앨범을 산 지 벌써 10년이 넘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들은 기억이 없단다.
그 다음은 <Keith Jarrett / Charlie Haden, Jasmine> 아, 틀자마자 바로 이거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이런 음악이면 충분하지. 2시가 다 되도록 우리는 한 끼도 먹지 못했지만, 길은 무척 막히지만, 이 비가 그치면 바람이 더욱 차가워질 것을 알지만, 오늘이 지나면 우리는 또 서로를 어떻게 대할지 알 수 없지만. 단지, 음악을 들을 뿐이다. 가만히 앉아, 잔잔히 퍼져나가는 울림을 가만히 좋아할 뿐. 그는 키스 자렛의 이 앨범이 유독 서정성이 짙다고 한다. 아무래도 좋아요. 좋은 건 좋으니까 좋은 거지요.
4.
autumn in newyork 식당 이름도, 인테리어도 메뉴판도, 로고도, 심지어는 같은 제목의 영화도!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음식 구성과 맛은 괜찮았다.
"버터 핑거스와 어텀인뉴욕, 앞으로 둘 중 한 곳에서만 영원히 식사를 해야 한다면 어딜 선택하겠어요?" 쓸모없지만 조금 열심히 고민한다. 지난여름 몇 년 만에 갔던 버터핑거스가 어땠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버터핑거스가 애들이 좋아할만한 곳이고, 이곳은 어른 느낌인 거 같아요, 라는 그의 설명이 참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5.
요즘 달달한 커피가 좋아요. 그래서 월남라떼-
6.
저녁 먹기엔 조금 이른 시간에도 사람이 많은 걸 보니 괜찮지 않을까, 하고 들어간 음식점에서 점저저 혹은 점점저저저에 가까운 식사를 하며 앞으론 사람이 많고 적음을 떠나 우리의 직감에 의존하여 식당을 선택하기로 했다. 그래도 불안한 마음에 사람이 많은 곳을 선택하게 된다면 어떤 사람이 앉아있는지 쓰윽 한 번 살펴보고 들어가자고. 포치에그샐러와 토마토 스파게티와 기네스 생맥주. 오직 맥주만을 남기지 않고 마신 뒤 계산하는데 직원이 맥주 맛이 괜찮았냐고 묻는다. 맥주 맛을 확인할 것이 아니라 음식 맛을 확인해야 하지 않나요, 말하고 싶었으나 맥주 맛 좋았어요. 얌전히 대답했다.
7.
보드랍고 탱탱한 스폰지 빵 한 봉지를 k에게 쥐어주고 안녕,
8.
올해의 마지막 세미나를 마치고 집에 와서는 오래 멍하니 누워만 있었다. 버스에 올라타자마자 "아, 따뜻하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데 내가 말하고도 어색하여 놀랐다. 이 차가운 바람이 눈뜨고 일어나면 한 여름의 뜨거운 열기로 바뀌어 있을 것만 같다. 춥다, 라고 말하면서도 이 추위를 믿을 수 없다. 나의 마음은 아직 지난여름 어디를 맴돌고 있다. 상관도 없는 이성복의 시 제목을 자꾸만 중얼거린다. 그 여름의 끝, 물론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지 않았고, 나의 절망은 끝나지 않았다. 그 여름의 끝, 장난처럼 혹은 장난 같은 절망이 시작되었다. '인간이 극한 상황에 직면하여 자기의 유한성과 허무성을 깨달았을 때의 정신상태'가 절망이라면, 계속해서 스스로의 한계에 직면하고 있는 나는, 허무하다는 말만 허무하게 내뱉고 있는 중이다. 허虛, 머리도 마음도 비어있다. 채워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