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새벽
오늘은 사무실 출근 전에 클라이언트를 만나 회의 하는 날. 회의 시간이 10시 30분인데다, 장소가 사무실보다 훨씬 가까운 곳이라 전날밤 출근용 알람은 몽땅 꺼버리고 8시부터 울리는 새 알람을 맞췄다. 죽 먹고 만화책 보다가 씻기 귀찮아 침대에 누워 졸고 있는데 K에게 전화가 왔다. PM10:41 아픈 나를 일찍 재우겠단다.
나 씻지도 않았는데
안 씻고 그냥 자면 돼지
이 닦아야 하는데
가글하면 돼지
가글 다 떨어졌는데
아이고오 주문해야겠네.
(……)
집에 와서 손 씻고 세수 했어요?
집에 와서 손만 씻었는데
화장 지워주는 클렌징 숍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거 있으면 진짜 좋을 텐데
아이고오
그런데 나 오늘 화장도 안 하고 출근했는데
그럼 더 잘됐네
나 불도 안 껐는데
스틱(등산용)으로 끄면 돼지
스틱 옆에 없는데
그럼 책 한 권 들고 스위치 가까이 간 다음에 책으로 눌러서 끄면 돼지.
(……)
…… 쓰고 보니 K는 나랑 참 열심히 통화를 하는구나. ㅠㅠ
이렇게 성실해 뿌룽.
어쨌든 결국 그렇게 세수도 안 하고, 이도 안 닦고, K에게 말하진 않았지만 죽 먹은 그릇도 치우지 않고, 이것도 말하진 않았지만 바지도 갈아입지 않고 잤다. 눈 뜨니 4시가 좀 넘었더라. 새벽에 꾼 꿈은 이때 꾼 걸까? 아니면 일어나서 죽 먹은 그릇 치우고, 바지 갈아입고, 세수하고, 이 닦고 다시 잠들었을 때 꾼 꿈일까? 기억나지 않는다. 사실 중요하지도 않고. 다만 오랜만에 내용이 기억나는 꿈을 꿨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스페인에 갔다. 스페인 간 건 좋은데 끔찍하게도 가족여행이다. 아빠가 있었고 고모들이 있었다. 가족여행에 내 친구가 동행했는데 이유진이다. 이것도 뜬금없다. 스페인 여행이건만 이삼일 정도 영국에서 머무르기로 했고, 스페인스러우면서 독일스러운 런던 한복판이 꿈의 배경이었다. 스페인스러우면서 독일스러운 런던 한복판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템스 강이 흐르고, 다리가 있고, 빅벤이 보이니 런던인 건 맞는데, 그 외 요소들은 (가보진 않았지만) 내가 아는 런던의 모습이 아니었다. 런던 중심에 높은 산이 있어 마차였는지 봉고였는지 기억나지 않는 무언가를 타고 산길을 삥 둘러 올라가며 내려다보는 템스 강과 빅벤이라니!
분명 가파른 산길을 오르고 있었는데, 어느새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고, 폭이 넓고 울퉁불퉁한 길 위를 지나고 있었다. 여전히 마차인지 봉고인지 모를 것을 타고. 길바닥엔 노숙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널브러져 있었는데 운전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 위를 지났다. 숙소에 도착해서 짐을 풀고 가족들과 다함께 돌아다니며 첫 날을 보낸 듯하다. 런던 이튿날엔 비가 내렸다. 이유진에게 둘만 따로 돌아다니자고 했는데, 이곳 지리 잘 모르겠단다. 나는 이유진에게 런던에서 공부도 했으면 왜 모르냐고 우기며(실제로 이유진은 샌프란시스코에 있었고, 나와도 친구인 이유진 구남친이 런던을 좋아했….) 런던의 핫한 서점에 가자고 했다. 휴대폰 로밍이 안 된 건지, 배터리가 없는 건지 K와는 연락이 안 돼서 답답한데, 그 와중에 어떻게 하면 하루라도 더 이곳에 머무를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회사에 전화해서 뭐라고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 꿈에서조차 왜... 왜인가.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어둡고, 그로테스크하고, 영화 <웃는남자>의 그런 분위기의 꿈이었는데, 꿈에서 깨자마자 여행은 좋구나, 여행 가고 싶다, 생각이 들면서 이어 꾸고 싶었지만. 평소에는 이어 꾸기 잘만 되더니 이럴 땐 꼭 안 되더라.
그리고 갑자기 글이 쓰고 싶어졌고, 어떤 이야기가 생각났다. 이야기는 꿈과도 아무 상관없다.
내 것을 만들어내야만 한다. 그래야 회사를 그만둘 수 있다. 회사를 그만 둔다, 그리고 내 것을 만들어내야 한다. 이전엔 후자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무능하고 가난한 나는 전자가 아니면 방법이 없다. 스스로를 더욱 강하게 내몰아 세워야 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