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록> 장 자크 루소
장 자크 루소 <고백록> 2부, 제7권 (1741-1747)
2부를 시작하면서
"내 고백록의 1부는 전부 기억만을 갖고 썼기 때문에 많은 착오를 범했을 것이 틀림없다. 2부 역시 기억으로 쓸 수밖에 없어서 아마 훨씬 더 많은 착오를 범하게 될 것이다.
(…) 내 기억은 오직 즐거운 대상들만을 회상하기 때문에 잔혹한 미래만을 예견하는 내 겁에 질린 상상력에 다행스럽게도 균형을 잡아준다. 이 작업에서 내 기억을 보충하고 내 길잡이가 되도록 모아두었던 서류들이 모두 남의 손으로 넘어갔고, 다시는 내 수중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꼭 하나 믿을 수 있는 충실한 길잡이가 있다. 그것은 내 존재의 연속성을 나타냈던 감정들의 연쇄, 그리고 감정들을 통해 그 원인이자 결과였던 사건들의 연속성을 나타냈던 감정들의 연쇄이다. 나는 내 불행은 쉽게 잊어도 내 잘못은 잊을 수 없다. 더욱이 내 선량한 감정은 훨씬 더 잊혀지지 않는다. 그것에 대한 기억은 너무나 소중해서 내 마음에서 절대 지워지지 않는다. 나는 사실들을 빠뜨리거나 날짜의 순서를 바꾸거나 날짜에 착오를 범할 수 있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느꼈던 것이나 내 감정에 따라 했던 것에 대해서는 착각할 수 없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특히 중요한 것이다. 내 고백록의 본래 목적은 내 삶의 모든 상황들에서 나의 내면을 정확히 알리는 것이다. 내가 약속했던 것은 영혼의 역사이고, 그것을 충실하게 쓰기 위해서 내게는 다른 기록들이 필요하지 않다. 지금껏 했던 것처럼 내면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제는 작년이 되어버린 2012년, 두 번의 글쓰기 수업을 들었다. 매 주 주제에 따라 한 편의 글을 썼다. 나의 스무 살에 대하여, 나의 인연에 대하여, 연인 혹은 동무나 어떤 관계에 대하여, 여성에 대하여, 노동에 대하여 등등. 다양한 주제로 쓴 모든 글에는 내가 있었고, 너무나도 당연히 그 모두 나의 이야기였다. 글에는 인생의 교훈은커녕 재미도 감동도 없었다. 글에서 보이는 내 자신이 궁상맞고 보잘 것 없어 서글펐다. 그렇지만 가끔은 누군가에게 어떤 정서작용을 일으키기도 했다. 내 글을 읽고 자신도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어떤 감정의 일부를 발견한 것 같다던가, 읽는 내내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던가, 눈물이 났다던가, 감정의 연쇄작용이 일어났다던가(칭찬만 적고 있다).
궁금해졌다. 우리는, 아니 나는 왜 글을 쓰는지. 왜 글이 쓰고 싶은 것인지. 나는 특별히 소설가나 시인이 되고 싶은 게 아니다. 그렇다고 평론가가 되거나, 특정 장르의 작가가 되고 싶은 것도 아닌데 그럼에도 나는 왜 글을 쓰고 싶은 것인지. 그리고 그 '나'의 글쓰기가 일기쓰기에서 그치는 정도가 아닌 공적인 자리에 던져졌을 때 어떤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인지. 글쓰기의 1차적 목적은 자기 구원인데 그 자기구원은 그럼 어디서 오는 것일까. 자신의 내면을 외면으로, 자신의 내면을 양식화하는 그 과정이 궁금했다. 아직까지 잘 정리되지 않은 내 속의 많은 질문들을 끌어안은 채 시작한 게 내면세미나였다.
아직까지 난 루소에 대해 잘 모르겠다. 루소의 인생을 낱낱이 들여다보거나 그를 평가하기보다는 자신의 삶을 이렇게까지 적나라하게 폭로 했다는 그 자체만으로 나의 루소 읽기는 계속 된다. 대체 왜? 진실에 대한 강박? 그의 마음에서 절대 지워지지 않는 기억 때문에? 그는 영혼의 역사이고, 내면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중요하고 그걸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한 시대를 살았던 한 영혼의 역사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타인에 의해서가 아닌 자신의 육성으로 기록하는 역사라는 점에선 그 의미에 크게 동의하나 ‘내면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의 의미를 아직까진 정확히 모르겠다. 진실성 추구 이면에 계속해서 나타나는 자기 합리화에 몰입도가 떨어지기도 한다. 자기 객관화가 가능하긴 한 걸까? 아니면 단지 불가능한 자기 객관화를 위해, 그러니깐 '내면을 속속들이' 혹은 '내면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을 위한 한 인간의 지난한 노력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인가.
1
1부에선 레 샤르메트에서 최후의 공중누각을 세우고 자신의 기보법을 확실한 성공으로 믿으면서 파리로 떠나는 데서 끝났다. 방황하는 청년시절을 보낸 루소는 파리에 정착하면서 음악 악보의 필경사 일을 시작하고 당대의 계몽주의자들인 디드로, 달랑베르, 콩디야크 등과 교류를 한다.
1742년, 루소는 다므쟁 씨, 브조 씨, 카스텔 신부의 도움을 받아 프랑스과학아카데미에서 논문 <새로운 악보 기호에 관한 제안>을 발표한다. 나는 음악 듣는 것은 좋아하나 이론에 관해서 문외한이기에 그가 말하는 이론적 설명은 당최 이해할 수 없었다. 루소가 음악과 관련 깊은 인물이라는 건 비교적 덜 알려진 걸 보면 그 자신의 생각과 달리 논문이 그리 유익하지 않았던 걸지도 모른다. 루소는 심사위원들이 유능한 학자이나 아무도 음악을 몰랐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2
나는 이러한 나태하고 고독한 생활을 3개월 동안 계속할 만한 돈도 갖지 못했으면서도 안도감과 즐거움과 자신감을 갖고 이러한 생활에 빠졌는데, 이런 것들이야말로 내 생애의 특이한 점들 중 하나이며 내 기질의 기묘한 점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 어떤 철없는 짓에 열중하든 나는 언제고 거기에 같은 논법을 적용하였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누구든 무슨 일에서든 뛰어나기만 하면 반드시 알아주는 사람이 생긴다. 그러니 무엇이고 좋으니 뛰어나 보자. 그러면 세상 사람들은 나를 찾을 것이다. 기회는 생길 것이고, 그 다음은 내 재능에 달린 일이 될 것이다.' 이런 유치한 생각은 내 이성에서 나온 궤변이 아니라 내 나태에서 나온 궤변이었다. 전력을 다하기 위해 필요했을 엄청나고 신속한 노력에 겁을 먹고 나는 내 게으름에 영합하려고 애썼고, 내 게으름에 합당한 이유를 대면서 그것에 대한 부끄러움을 감추었다. (p27-29)
루소는 아침마다 뤽상부르 공원으로 상책을 나가 성가나 목가를 외우고, 시인들의 명구를 외우거나 체스를 두는데 썼던 시간들을 '나태하고 고독한 생활'이었으며, 그러한 '나태에서 나온 궤변'이라고 하며 그리 자세히 설명하진 않지만, 이 나태의 시간들이 오히려 그가 음악에 몰두하던 시간들보다 중요했던 시간들이 아닐까 싶다. 백 번 외우고 백 번 까먹었으나, 당대 일류 체스 선수들 모두와 사귀게 된다고 실력이 더 느는 것은 아니었으나, 아무 것도 생산해 내지 않음, 무위, 잉여의 시간, 이 명명(命名)할 수 없는 시간들이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에 밑거름 되진 않았을까.
3
1743년 루소는 브로이유 부인의 추천으로 몽테귀 백작의 서기관이 되어 베네치아로 떠난다. 그곳에서 그는 타고는 '직감적인 감수성'으로 이탈리아 음악이 불어넣는 정열을 갖게 된다. 곤돌라 뱃사공이 부르는 노래인 바르카롤을 들으면서 그때까지 그런 훌륭한 노래를 들어본 적이 없다고 생각했으며 곧 오페라에 매우 심취하게 된다.
1년 뒤 즈음, 몽테귀 씨의 비열한 장난질 때문에 사직하고 파리로 돌아온다. 그 사건에 관한 소문은 그를 앞질러 먼저 파리에 도착했는데 이때 루소는 자신의 정당함을 전혀 인정받지 못했다.
내 고소가 정당함에도 불구하고 소용이 없다는 것은 이 불합리한 사회제도에 대한 의분의 싹을 내 영혼에 뿌려놓았다. 이런 제도에서는 진정한 공동선과 참다운 정의가 어떤 표면적인 질서에 늘 희생되는데, 이 표면적인 질서야말로 사실 모든 질서를 파괴하며 약자의 억압과 강자의 부정행위를 공적인 권위를 갖고 단지 추가적으로 승인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당시 두 가지 요인이 이 싹의 성장을 방해하여, 그 이후에야 이 싹이 성장하게 되었다. (p89)
루소는 1부에서 "적들에 의해 왜곡되지 않은, 내 성격을 기록한 확실하고도 유일한 묘비"라고 말하며, "나는 내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이 내게 악의를 품을 충분한 구실을 제공하지만 그에 덧붙여 내 침묵을 통해 그런 구실을 제공하지 않겠다." 라고 하는데 이러한 사건들이 그가 계속해서 글을 쓰게 만든 게 아닐까 싶다. 단순히 어떤 진실에 대한 강박보다는 죽음보다도 죄보다도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수치를 두려워했던 데서 나온 것인지 모르겠다.
4
루소는 자신의 친구 카리오의 친구인 한 비스카야 사람 그리고 이그나시오 엠마누엘 데 알투나라는 스페인인과 우정의 매력을 느끼며 교제했는데 '오직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부분' 때문에 지속되진 않았다. 후에 아무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재능만을 이용해 독립적으로 지내기로 결심한 루소는 '겸손하게만 생각했던 내 재능의 진가를 이제야 알기 시작했'다며 오페라 일에 착수한다. 그리고 그때 머물렀던 생캉뎅 여관에서 세탁 일을 하는 테레즈 르바쇠르라는 여자를 만난다.
그가 만든 오페라 <사랑의 시신들>을 무대올리기는 실패하고, 그가 손질한 볼테르와 라모의 합작 <라미르의 향연>에 자신의 이름은 올라가지 않는다. 그는 출세와 영광의 온갖 계획은 포기하고 테레즈와의 생활비를 마련하는 데 시간과 노고를 바치기로 한다. 그러다 화학에 끌려 화학공부를 시작한다. 참 많은 것에 관심이 있었던 사람이었다. 화학공부와 뒤팽 부인 밑에서 서기관 일을 하며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리는데 그런 모임 자리에서 그는 '기아 수용시설에 어린애를 가장 많이 보내는 사람이 언제나 제일 갈채'를 받았던 이야기에 솔깃했다고 한다.
"이것이 이 나라의 관습인 만큼 여기서 사는 동안에는 이 관습을 따라도 된다." 그리고 그는 조금도 양심의 가책 없이 대담하게 그렇게 결정했다고 한다. 7권의 시기에는 첫 번째 아이를 고아원으로 보낸다(1746). 파멸을 초래하는 그 최초의 시기다. 뒤에서 신물이 나도록 되풀이하기에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겠다고 한다. 루소에 관한 일화 중 테레즈에게서 낳은 아이들을 버린 것은 지금까지 논란이 되고 있으며 주요한 전기적 사항인 만큼 뒤에 더욱 자세히, 계속해서 나올 것으로 예상되는데 7권에선 그 나라의 제일 갈채를 받는 관습이었다는 말로 자기변명, 자기합리화, 사후(事後)궤변의 초석을 깔아놓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