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만에 몸무게 육 킬로그램 줄었다. 기생충 약을 먹어야하지 않을까 고민할 정도로 대단한 식성이었는데 9월 첫째 주부터 배고픔이란 걸 잊고 지냈다. 당연히 몸에도 변화가 왔다. 끙끙 앓아누운 건 아니었지만 오랜만에 신경성 위염이 찾아왔고, 식사 후에는 디저트처럼 소화제를 먹었다. 2주만에 생리를 다시  시작했고, 철저한 현실반영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전형적인 내상 후 스트레스 증상. 연구실에 있거나 약속이 있을 땐 아주 잘 먹었는데 혼자 있을 땐 거의 챙겨먹지 않다가 밤늦게 한 끼도 안 먹었다는 사실이 생각나면 김밥 한 줄로 때웠다. 체중계에 찍힌, 20대 이후 두 번째로 마주한 4로 시작하는 숫자를 보면 역시 살 빠지는 데에는 마음고생만한 게 없구나 싶지만 진부한 과정을 답습하고 있는 것만 같다. 구질구질하다 참으로. 

 

요즘은 삼시세끼 강박적으로 챙겨먹으려고 한다. 어제는 온종일 아무 것에도 집중이 되지 않는 하루. 한 것도 없이 저녁 먹을 시간이 왔다. 산책 겸 나가서 김밥 한 줄이나 사올까 하다가 오랜만에 쌀을 씻고, 불리고 안쳤다. 쌀밥을 좋아하지 않아 항상 잡곡을 넣는데, 뜸들일 때쯤 되어서야 넣지 않은 걸 알았다. 밍밍한 쌀밥을 먹게 되겠군 싶었는데 솥뚜껑을 여는 순간 김이 퍼져 나오며 흰 쌀밥에 윤기가 흐르는 것이 어찌나 먹음직스러워 보이던지. 얼마 전 취재 때문에 인터뷰어는 매번 밥하기가 귀찮아 한꺼번에 밥을 한 뒤 비닐봉지에 나누어 담아 냉동실에 얼려두고 먹는다고 했다. 밥은 물론 잡곡밥. 음식점에서 뜨끈뜨끈한 쌀밥이 나오면 감격스러워 배가 불러도 안 먹고는 못 배기겠다고 했는데 그 마음을 알겠더라.



그릇에 담기도 전에 한 숟갈 떠 넣는 순간. 입 안 가득 퍼지는 후끈한 열기, 혀를 부드럽게 긴장시키는 매끈함과 적당히 차진 달큼한 쌀밥 덩이- 별다른 반찬 없이 깻잎무침으로 한 공기 뚝딱 해치웠다. 마지막은 한 숟갈은 반찬 없이 오직 쌀밥으로만.

 

다른 요리는 못해도 밥 하나는 잘 짓는다고 큰 소리치곤 했는데 올해 내가 한 밥은 전부 실패였다. 집에서도 돌솥 밥을 두어 번 태워먹었고, 삼삼이네 전기밥솥으로 지은 밥은 늘 질다 못해 죽이 되었다. 지리산 종주 갔을 땐 남들 고기 굽고 라면 끓이고 사냥꾼의 냄비 만들 동안 저는 밥을 잘 지어요, 하며 코펠에 밥을 안쳤다가 또다시 태워먹었다. 덕분에 3일 동안 눌어붙은 코펠에 그대로 음식을 해먹어야 했다. 오늘은 정말이지 되지도 질지도 않은 완벽한 쌀밥을 지었지만, 나는 거실 형광등 불빛에 의지한 채 전구 나간 부엌에 홀로 서 있구나. 신나서 사진까지 찍었지만 조용히 혼자 만족하기로 했다. 냠냠쩝쩝...





                                                                             2013.1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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