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1학년 때 엄마는 반 어머니회에 가입했었는데, 그때 어머니회 어머니들 몇 분이 따로 모임을 꾸렸다. 1학년 9반 이었기에 모임 이름은 일구회. 12년 교육과정 교과서에 나오는 명소(서울과 서울 근교) 대부분을 일구회 모임 덕분에 다녀왔다. 엄마들 참 부지런하셨다. 문화 체험시키겠다며 주말마다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셨으니.
공연이나 전시를 보기 위해 예술의 전당에도 참 많이 갔었다. 문제는 뭘 보고 왔는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 서울 안에 있는 모든 궁, 선사유적지부터 서대문 형무소까지, 강화도 초지진 등등에 갔던 기억은 희미하게라도 남아있는데 예술의 전당에 관한 기억이라곤 돈까스 집뿐. 예술의 전당 앞 횡단보도를 건너 그대로 쭉 직진하다 보면 나왔던 것 같은, 좁은 지하계단을 내려가야 했던 돈까스 집. 공연이나 전시를 보고 나면 배가 많이 고팠기에 방금 튀긴 바삭바삭한 뜨거운 돈까스를 급하게 먹다가 종종 입천장을 데었다. 그렇게 주린 배를 채우고 나면 지하에서 빠져 올라와 엄마들이 폭풍수다를 떨고 나올 때까지 그 앞 좁은 인도에서 얼음땡 같은 걸 하며 놀았던 것도 같고. 어쨌든 나에게 예술의 전당 가는 날은 돈까스 먹는 날이었던 것이다.
3월의 어느 금요일 아침, 고흐 전을 보기 위해 예술의 전당엘 갔다. 점심으로 백년옥 순두부찌개 먹고 남부터미널로 천천히 걸어가는데 문득 그 돈까스 생각이 났다. 아직 있을까. 함께 걷던 그에게 말했더니 음식점 이름 혹시 '허수아비' 아니냐고 한다. 우리나라에 처음 생긴 일식 돈까스 집으로 유명한 곳이었다고. 대학 다닐 때 맛집 정보 빠삭한 친구 선배 소개로 왔었단다. 나는 이름까진 기억나지 않았지만 위치와 내부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서로 맞추어보니 같은 곳이 맞는 듯했다. 예술의 전당 가는 날은 꼭 그 집에 갔으니 엄마들 사이에서도 유명했던 모양이다. 초딩 나, 대학생 그. 요란스럽게 돈까스를 먹던 내 옆 테이블에 앉아 친구와 그 날 본 전시에 대한 깊은 이야기를 나누며 돈까스 나오길 기다리고 있던 이가 그였을 지도 모른다. 이 옆자리 꼬맹이들은 왜 이리 시끄럽나 생각했을라나. 좁은 계단이었지만 나는 아직 조그마했을 테고, 그 역시 작은 체구이니 우리 서로 스치듯 계단을 올라가고 내려갔을 지도.
얼마 전 넷상에서 화제가 되었던 사진이 있다. 아빠, 엄마, 딸로 구성된 한 가족이 어느 건물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그 뒤론 지나가는 행인 1, 2, 3…. 그 딸이 커서 결혼을 했고, 어느 날 남편이 그녀의 어린 시절 앨범을 들춰본다. 어느 사진에서 낯익은 얼굴이 보여 자세히 들여다보니 자신의 아버지가 주름살 하나 없는 얼굴로 사진 속에서 웃고 있지 않은가. 건물 앞에서 찍은 사진의 지나가는 행인 1, 2, 3 중 한 명이 그의 아버지였던 것. 아버지는 유모차를 끌고 있었고, 유모차에 앉은 아이는 가려져 보이지 않지만, 사진 찍은 날짜를 확인하니 본인(남편)일 수밖에 없다는 것!
그러니까 이런 스침의 순간이 우리에게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거다. 그렇게 따지면 예술의 전당이나 허수아비 식당뿐이겠는가. 내가 태어난 년도 이후면, 그 어느 곳에서라도 가능한 일이지. 단 한 번 어느 장소에서 스쳤을 수도 있고, 여기저기서 몇 번을 스쳤을 수도 있고(확률적으로 매우 불가능하겠지만), 어쩌면 한 마디 말이라도 나눴을 수도 있고(이 또한 확률적으로 매우 불가능하겠지만), 스치진 않았지만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었을 수도 있는 거다. 영화 <첨밀밀>의 처음과 마지막 장면처럼. 홍콩행 열차에서 서로 등지고 앉아 뒷통수 맞대고 졸고 있던 여명과 장만옥처럼 말이다.
훗날 그들이 각자 몇 시에 무슨 열차를 타고 홍콩 어느 역에 도착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 기가 막힌 우연을 알고 기뻐할 수 있겠지. 어쩌면 그 열차표를 둘 다 간직하고 있어 서로 등을 맞대고 앉아있었다는 사실에 놀라워할 수도 있겠지. 평생 모르고 죽을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지만 말이다.
지금부터 그와 마주 앉아 서로의 지난날들을 하나하나 추적해나가 볼까나. 그런데 말이다. 인간은 착하게 살고 볼 일이다. 갑자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하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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