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에서 주간님이 직접 만든 양념으로 돼지고기 굽고, 누군가 보온병에 담아온 커피는 출발도 전에 마셔버리고,

통인시장에서 전과 떡볶이와 김밥과 치킨을 사고, 막걸리 15통 나누어 짊어지고, 달맞이 인왕산 등산.

지난번 우중산행 때와는 달리, 서울 저 멀리까지 보이더라.

산길에 피어난 풀 하나하나 들여다보며 가는데. 지금 기억에 남는 건 정말로 기름이 나는 골풀, ‘기름골’ 뿐이다.

그 보라색 작은 풀꽃의 이름은 무엇이었더라. 

표정이 있던 풀꽃, 함께 들여다보던 그는 사슴처럼 생겼다며 '사슴풀' 이라고 부르잔다.

정상에 올라 자리 잡아 우리의 달맞이 행사가 시작되었다.

주간님이 준비하신 주전자! 막걸리 콸콸콸 주전자에 부어 따라 마셨다. 술 붓는 소리 조오쿠나!

달을 보러 간 것인지, 술을 마시러 간 것인지. 짙어지는 하늘 속에서 술과 음식과 노래와 시가 난무하는 밤.

취기가 꽤 올랐는데 그 와중에도 마음에 들어오는 문장들을 기록해놓았더라.

귓가에 남아 맴도는 건 김수철의 노래를 틀었을 때 따라 흥얼거리던 그의 목소리… 







                                                                                                                        2013 09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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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깊은 곳은 피부다   (폴 발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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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에 이어 마음의 곡진함과 단독성에 관한 이야기) 

사무친 기억

사무치다, 깊이 스며들거나 멀리까지 미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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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번 동백이(모란이) 필 때가지 나를 잊지 말아요 -  (굴기 선생님의 십팔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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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바라노니, 노래하고 술 마실 동안은

달빛이 술잔을 비추어주길

 

 이백, <파주문월把酒問月> 중에서 


 

다행히 우리 노래하고 술 마실 동안은 달빛이 비추어 주었네.

도시의 아련한 불빛도 우릴 비추어 주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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ㅅㅂ언니가 읊었던 시

 


     당신 없이도 또 봄날이어서

     살구꽃 분홍빛 저리 환합니다

     언젠가 당신에게도 찾아갔었을

     분홍빛 오늘은 내 가슴에 듭니다

     머잖아 저 분홍빛 차차 엷어져서는

     어느 날 푸른 빛 속으로 사라지겠지요

 

     당신 가슴 속에 스며들었을 내 추억도

     이제 다 스러지고 말았을지도 모르는데

     살구꽃 환한 나무 아래서 당신 생각입니다

 

     앞으로 몇 번이나 저 분홍빛 그대와 나

     우리 가슴 속에 찾아와 머물다 갈건지요

     잘 지내 주어요 더 이상 내가 그대 안의

     분홍빛 아니어도 그대의 봄 아름답기를


      강인호, <봄 안부>




人有悲歡離合     사람에겐 기쁨과 슬픔과 만남과 헤어짐이 있고

月有陰晴圓缺     달에겐 밝음과 어둠과 차오름과 이지러짐이 있으니

此事古難全        세상사 완전할 수는 없다네

但願人長久        그저 그대가 오래오래 살아만 주어

千里共嬋娟        천리 밖에서도 저 달을 함께 보기를


 소동파, <수조가두水調歌頭>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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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서 술이 떨어지는 것은 범을 만나는 것보다 무섭다."   (굴기 샘)



그렇게 우리는 가져간 모든 것들을 비우고 가볍게 하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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