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을 울던 사람들에게는

   등 뒤에서 언제나 감당 못할 비가 온다

   떠나면 되는 일처럼 그렇게 날들은 가고

 

   한때를 푹 적셔본 사람은

   잠결에도 비가 온다

   - 이사라, <폭우> 중에서

 

 

지난 목요일 아침이었나. 천안 가는 기차에서 오래 머물러있던 시구. 요즘 엄청 신파에 빠져있는 분께 보내드리고 싶었다. 그의 등 뒤에선 언제나 감당 못할 비가 오리라. 잠결에도 비가 오리라. 오래 묵은 눈물 냄새가 나리라.

 

 

이사라 시인, 이름만 듣고 젊은 시인일 거라 생각했다. 시를 읽은 적도 없고. 그럼에도 기억에 남아있던 건『훗날 훗사람』시집 제목 때문인 듯. 이번 문학동네 시인선은 디자인도 좋지만(문지 시집에 워낙 익숙해져있어 그랬는지 사실 처음엔 도무지 적응되지 않았다) 시집 제목들이 정말 아름답다. 순전히 제목만 보고 책을 산 건 그동안 내가 산 모든 책을 통틀어 문동 시인선이 처음. 박준의『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를 시작으로『당신 집에서 잘 수 있나요』『쓸모없는 노력의 박물관』(허수경과 오은 시집은 허수경과 오은이었기에 샀으므로). 박준 시집은 제목도 시도 좋아서 지난 시 세미나 때 함께 읽었다. 나는 제목만 보고 시집을 골랐고, 한 친구는 제목만 보고 좀 간지럽게 느껴져 읽고 싶지 않았다는데 시 세미나 끝날 무렵 좋은 시 함께 읽어서 좋았다고 고맙다고 하더라. 후후.




 

 

혹자는 오은 시집을 읽고 전체적인 시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제목이라며 문학동네의 마케팅 수법을 문제 삼았다. 그의 말놀이는 '재잘재잘' 여전히 유쾌하지만, 풍자와 냉소가 꽤 짙게 서려있는『호텔 타셀의 돼지들』과는 확연히 달라진 시의 분위기에 나 역시 조금 당황했다. 그랬기에 그분 말에 어느 정도 동의는 했지만 시집 일독한 뒤엔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엄습하는 것들을 사랑해)" 한 권의 시집에 담긴 시 전체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시구다. 그 시구가 쓰여 있는 시 <아이디어>는 오은이 시를 쓸 때 감각과 '아이디어'를 끄집어내는 시적 방법론이 아닐까 싶고. 무엇보다 '분위기'라는 것은 개별 요소들에 의해 단독적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것들의 어우러짐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 그렇기에 더더욱 오은다운 문장이 아닐까 싶다.


   어떤 느낌들이 있다. 문밖으로 나가는 누군가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 살면서 그 사람과 한 차례는 

   더 마주칠 것 같다는 느낌, 붙잡을 모질음도 붙잡힐 안간힘도 쓰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 단어들은 그렇게 내 몸 속에서

   빠져나갔다. 기다리고 품고 헤어지고 또 한 시절을 헤매다가 처음인 양 다시 스칠 것이다. 모든 시집은 단어들의 임시거처다.


오은은 이 시집 제목을 <아이디어>바로 앞에 실린 시의 제목인 <이것은 파이프다>로 정했었는데 편집자가 바꾸었단다. 마침 그날 오후, 친구가 보여준 사진은 그 편집자의 시구였다.


   배가 부르지 않고서는 절대

   여자는 남자를 사랑할 수 없으므로

   - ㄱㅁㅈ, <솔직해집시다> 중에서

 

 

세미나도 끝났으니 한동안 시집 못(안) 읽겠구나 싶었는데 무척이나 읽고 싶어졌다. 다음날 바로 그녀의 두 번째 시집을 샀고, 늘 그랬듯이 문지 시집 뒤표지의 자서부터 읽는다. 자서가 좋으니 시들도 좋을 거란 기대를 품고 천천히 읽고 있는 중.

 


   어느 여름

   예식장에서 밥을 먹고 나오는데

   계단 위의 한 여자,

   어깨너비로 다리 벌린 채 우뚝 서 있었다.

   발목과 발목 사이에 걸쳐진 그것은

   그러니까 팬티였다.


    나라면 추켜올렸을까,

   아니면 벗어버렸을까.


   더러운 팬티를 수치스러워하기보다

   낡은 팬티를 구차해하기보다

   고무줄의 약해진 탄성을 걱정하는 데서부터

   시라는 것을


   나는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




 +

함께 읽고 있는 책은 화요일 저녁 주간님이 추천해주신 시집『또또』.  최근에 읽은 가장 강렬한 상처와 사랑의 기록이란다.  토요일 아침, 아직 문도 열지 않은 광화문 교보문고 앞에서 서성거리다가 9시30분 땡, 셔터가 올라가자마자 샀다.

 

 +

역시 순전히 제목만 보고 벼르고 있는 시집들. 『친애하는 사물들』『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훗날 훗사람』『구름과 집 사이를 걸었다』(이건 제목 전체라기보다는 순전히 구름이란 단어를 좋아하기 때문에)『읽자마자 잊혀져버려도』(제목이 좀 간지럽긴 하지만)  /  김이듬 두 번째 시집『명랑하라 팜 파탈』

 

 + 

나는 언젠가 오은 시인을 '아주 우연히'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늘 첫 번째 시집에 실린 시의 한 구절에 대해 질문할 준비를 하고 있다. 


 +

기형도 시집을 다시 읽으려고 꺼내두었는데 여전히 책장을 넘기기 힘들구나.


 

 

'2013'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거리  (0) 2013.11.14
야무진 등산번개  (0) 2013.11.11
아마도 분리불가능  (0) 2013.11.09
쌀밥  (0) 2013.11.04
손톱의 재발견 3  (0) 2013.11.04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