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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에 퇴근하자마자 비행기 타고 부산으로 갔다. 비행기에서 내려 공항을 빠져나갈 때까지 잠시 낯선 곳으로 여행 온 기분을 만끽하다가 지하철 내 옆자리에 앉은 삼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성의 쾌쾌한 냄새를 맡자마자 정신이 돌아왔다. 비행기 타고 40분 날아가봤자 한국 못 벗어나지. 서울에서 부산까지 비행시간 40분인데, 김해공항에서 해운대역까지 지하철 1시간이다. 지친다 지쳐. 호텔 근처에서 까지복국을 먹었다. 사케 한 잔 반주로 곁들였는데, 음식점 주인이 잔의 윗부분, 그러니까 입 닿는 부분을 손으로 잡고 와서 무척 불쾌했다. 심지어 그 잔은 아랫부분이 비어 있어서 잡아도 뜨겁지 않았음. 호텔 근처에서 마사지 받았다. 나는 근육통이 풀렸고 K는 없던 근육통 생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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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으로 전복죽을 먹고 F1963에 가보기로 했다. (구)고려제강의 폐공장을 리모델링하여 조성한 복합 문화공간이란다. 이런 유휴공간을 허물고 새로 짓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틀을 건축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반갑고 좋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폐쇄한 채 방치해두는 것보단 들어가서 남아있는 흔적을 탐사라도 해볼 수 있으니까. 다만 여기에 따라붙는 '복합+문화' 공간이라는 말은 늘 미심쩍다. 무엇을 '복합'하며, 추구하는 '문화'는 또 뭘까. 큰 규모의 중고 서점이 들어올 예정이라고 하던데.
테라로사에서 커피 마시고, 그 옆에 있는 체코 음식점에서 간단하게 점심 먹었는데 음식 너무너무 짜다. 복합문화공간에서 머물다 나왔더니 이상하게 체력이 방전되어 일단 센텀역으로 갔다. 백화점밖에 없는데 일단 왔으니 구경이라도 해 보기로. 신세계 센텀 입구에는 세계 최대 백화점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됐다는 인증서를 전시해 놨던데. 한국인에게 기네스 대체 뭘까….
재작년에도 그렇고 이상하게 부산 갈 때마다 안경에 꽂힌다. 서울에도 있고, 대전에도, 대구에도, 부산에도 있는 안경점인데. 부산에서 인생 안경을 만나네(재작년에 우연히 들어간 안경점에서 마음에 들고 잘 어울리는 린드버그 안경 발견. 너무 비싸서 조용히 내려 놓았는데 유럽 여행 중 로마에서 별생각 없이 들어간 안경점에서 발견. 세일 마지막 날에 득템했다. 무척 가볍지원 가벼워서 귀 뒤에 밀착하여 걸리는 느낌이 없고 너무 낭창낭창거리는 불편한 안경이지만 나에게 너무 잘 어울려서 떠나보내지 못하고 있다).
내가 본 모델 사진을 못 찾아서 비슷한 이미지로 대신한다. 일본의 안경 장인 RYO YAMASHITA의 대나무로 만든 안경.
그동안 봐온 나무 소재의 안경은 투박하고 소재와 굵기가 도드라져 부담스럽고 과하게 느껴졌다. 이 안경은 섬세하고 날렵하다.
그러나 아름다움과 편안함은 별개의 문제. 대나무라 피팅도 안 된다고. 무엇보다 가격이 엄청나다. 290만원. (……)
LUNOR의 스페셜 에디션 중 엔틱골드는 둥근 알이 좀 크지만 간격을 두고 두 번 써봤는데 두 번 다 괜찮았다. 컬러도 근사하다.
실버도 골드도 아닌 엔틱골드.코받침도 없다. 코받침 없는 안경을 경험해보고자 요즘은 가메만넨(KAME MANNEN) 안경을 즐겨 쓰고 있는데,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음. 다만 르노는 한국에서의 가격이 너무 높게 책정되어서 꽤 비싸다.
IDOTAMIO SAKU, 作 시리즈, T416. 일본의 3대 안경 장인 중 한 명인 이도타미오 선생의 작 시리즈.
이런 금테 안경도 어울리다니 기뻤음. 차가운 느낌을 주지만 세련된 안경. 하얀 셔츠 입을 때만 써야 할 것 같지만 아무렴 어때.
역시 코받침이 없어서 좋다. 뒷부분이 실리콘 처리되어 있어서 눌린 자국도 덜 하겠다.
ANNE ET VALENTIN, BOREL, H04. 코받침이 있지만 모양이 마음에 들어서 써본 안네 발렌틴의 올리브그린 안경.
색이 들어간 안경은 선호하지 않는 편인데, 올리브그린 색이 예쁘고 썼을 때도 튀지 않았다. 그럼에도 최종 후보엔 오르지 못할 듯.
후보에 오른 안경은 이런 것들이고. 어쨌든 백화점을 좀 더 둘러보다가 예상에 없던 지름을 하고 말았다. 흰색 로퍼를 샀다네.
저녁은 삼삼횟집에서. 횟집에 대한 나의 의문 1. 왜 스끼다시 많이 주는 횟집을 좋아하는가? 횟집에선 신선하고 좋은 횟감 맛있게 먹는 것이 궁극의 목표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스끼다시 없이 참돔 유비키와 밀치, 광어 세 가지 종류의 회와 초에 묻힌 밥이 나오는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지리에 마늘이 너무 많이 들어가서 먹기 힘들었지만. TV 없는 우리는 호텔 가면 TV 본다. 영화 <동주> 보고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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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시원한대구탕에서 대구탕을 먹고(부산에선 원래 마늘을 많이 넣어서 끓이나?) 부산역으로. 코인로커에 짐을 넣어두고 구 백제병원 브라운핸즈에 갔다. 1922년 개인근대병원인 백제병원 건물로 지어진 뒤 중국집, 일본인 장교 숙소, 예식장 등으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카페 브라운핸즈로. 건물 외관과 내부가 잘 살아있는 공간이다. 떡볶이 먹고 삼진어묵 두 봉지 사서 서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