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는 사랑이 아니고 독서라 하네

"취미는 독서·영화와 음악 감상, 특기는 글쓰기" 소개팅 자리에서나 할 법한 대답을 누군가를 만나면 자동인형처럼 늘어놓던 때가 있었다. 여기서 악센트는 '독서'와 '글쓰기'에 있는데, 이에 대한 상대의 예상반응은 적중률 99.9%다. "와"라는 감탄사를 시작으로 "책 많이 읽으시나 봐요." 그럼 나는 쑥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네, 책 읽는 거 좋아해요. 글은 그냥 일기나 쓰는 정도죠." 라며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이 나의 정체성인 것 마냥 오글거리는 대답을 하곤 했다. 읽는 나와 쓰는 나에 대해 말해보자면 나는 줄곧 ‘읽는 나’에 집중하며 살았다. 내가 무엇을 읽느냐가 곧 나를 말해주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니 책을 읽는 나의 '보여지는' 모습에 집중해왔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어렸을 때 친구들이나 동네 아주머니들이 집에 놀러오면 언제나 책이 빼곡히 들어 찬 책꽂이가 있는 방으로 안내했다. '작은 도서관'이라 불리던 방. 나는 책을 한 권씩이 아니라 내키는 대로 잔뜩 꺼내어 옆에 쌓아둔 채로 읽을 수 있고, 방바닥에 퍼질러 앉거나 엎드려 누워서도 읽을 수 있었다. 가나다 제목순이나 작가·출판사 순이 아닌, 책의 색깔이나 크기에 맞춰 줄 세워 놓을 수 있었고, 읽기 싫은 책은 제일 구석 자리에 거꾸로 꽂아 놓을 수도 있었다. 너덜너덜 누렇게 변색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세로로 쓰인 글자를 따라 읽어야 했던 <이상평전>이나 <니이체, 그래도 못 다한 한 마디>, <에밀>과 같은 책의 냄새를 마음껏 킁킁대고 맡을 수 있었으며,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사이에서 잠들어 있던 마른 단풍잎을 조심스레 빼내어 내가 아끼는 책 사이로 옮겨 놓기도 했다. 뭐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유일한 공간. 나는 방 안의 책보다는 그 방 안에 있는 내 모습을 사랑했다. 그래야 엄마와 아빠의 칭찬을 담뿍 받을 수 있었고, 집에 놀러온 누군가의 부러운 시선이 한 번 훑고 지나간 자리를 따라 엄마의 기분이 좋아졌으며, 또래 친구들과 나는 확실히 다른 존재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에. 무엇보다도 우리집 자그마한 TV를 책들이 가려주었고, 집이 좁아터지기 직전인 건 작은 평수 때문이 아니라 책 때문인 것처럼 보였으므로.


나의 자랑거리였던 그 책들은 문학청년이었던 아빠의 지난 세월이자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엄마의 꿈, 좋은 부모가 되어야겠다는 그들의 바람이었다. 아직 사교육보다는 '부모가 아이들 앞에서 책 읽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책 읽는 아이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같은 문구가 더 잘 먹히던 시절이었다. 남들은 모르는 가족 각자의 욕망이 종이 냄새와 함께 그 작은 방 공기 속을 떠다니고 있었다. 몇 년 뒤, 전업주부에서 취업전선에 뛰어든 엄마는 출판사 언저리를 기웃거렸는데, 정확히 무슨 일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홍보·판매 사원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내성적인 엄마 성격에 방문 판매는 맞지 않았을 테니. 우리집을 도서관처럼 꾸미고 사람들을 초대하면서 일하는 엄마지만 좋은 엄마의 역할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는 공개증명과 동시에 실적 올리기, 아이들 책 읽히기까지 욕망 삼종세트를 실현할 수 있었다.


내 기억의 부식층을 들추어 본다. 어린 나에게 사랑과 용기의 상징이었던 제인 에어,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계속해서 책장을 뒤적거리게 만든 히스클리프의 처절한 외침, 베르테르의 죽음. 일 년에 반을 엄마와 지상에서 반은 하데스와 지하에서서 그 신화적 삶의 방식만이 강렬하게 기억에 남은 데메테르와 페르세포네 이야기,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 맨발로 서있는 듯한 기분으로 한 달 가까이 날 쉽게 잠들지 못하게 만든 라스콜리니코프와 전당포 노파. 사실 이런 청소년 판 세계문학보다 강렬하게 남아 있는 건 두더지 머리에 똥을 싸고 간 동물들이지만. 요즘은 몇 년 전에 읽은 책의 내용도 가물가물한 나에게 책은 기억의 부식층으로 남아 있는 게 아니라, 단편의 정보만 빠르게 흡수한 뒤 지구 깊숙이에 있는 핵 속에서 들끓는 마그마와 함께 영원히 소멸되고 있는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 엄마 손을 잡고 시내의 한 대형서점에 구경을 갔다. 책으로 가득한 그 넓은 공간에 나는 완전히 압도되어버렸다. 지금도 종종 그 서점에 가면 서점 주인과 결혼하고 싶다는 우스꽝스러운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럴 때면 궁금해진다. 나는 책을 읽고 싶은 건지, 책을 갖고 싶은 것인지.



진실한 몰입과 연기 사이의 사르트르, 그리고 나

1부 '읽기'와 2부 '쓰기'로 구성된 사르트르의 <말>은 그의 유년 시절을 기록한 자서전이다. 사르트르는 한 살 때 아버지를 여읜 ‘덕분에’ 자신에게 초자아가 없고, 권력이라는 암에 걸려 있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을 끊임없이 창조해 나갈 수 있지만 동시에 어른의 축소판에서 어린애 역할을 톡톡히 해야 했다.


      한 인간이 이미 마련된 제자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 그러나 나로 말하자면, 지상의 어느 한정된 곳에서 시시각각으로 

     어떤 사람들 틈에 끼어 있고 거기서 자기의 존재가 군더더기임을 느끼는 것이 내 운명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내가 마치 물처럼, 빵처럼, 공기처럼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다른 모든 곳에서 아쉬운 존재가 되기를 바란 것이다.   (p101)


그는 자신이 속임수를 쓰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위장과 '집안의 연극'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공간 할아버지의 서재. 그곳에서 사르트르는 고정된 역할에서 벗어날 수 있음과 동시에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나아가 자신의 존재증명을 위한 글쓰기까지. 그것이 사르트르의 인정투쟁이자, 본질에 앞서는 '실존'이었을까. 그렇다면 나의 읽기는 어떠했는가, 쓰기는 또 어떠했는가. 나에게 작은 도서관의 책들은 그 자체가 위장이고 연극 무대였던 걸까. 나는 '문학병'이 아니라 그저 남다르고 싶은, 특별하고 싶은 병에 걸렸던 건지도 모른다. 변명이라도 해야 할까 싶어 사르트르의 말을 빌려온다. "진실한 몰입과 연기 사이의 아물아물하고 흔들흔들한 경계선을 어떻게 분명히 그을 수 있겠는가? 더구나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말이다."


이제 우리집에 놀러온 사람들은 예전만큼 놀라진 않는다. 그 많던 전집들은 진작 친척 집으로, 엄마 친구 집으로 보내버렸고, 21권짜리 <토지>만 유일하게 남아있다. 월말이 되면 더 이상 볼 것 같지 않은 책들이 유독 눈에 띄어 중고서점에 재빨리 팔아버렸지만, 이미 수량이 많아 팔지 못하는 책들은 짐짝처럼 남아있다. 나는 여전히 책을 읽는다. 책으로 인해 갑자기 내 행동이 변하고 삶이 달라지거나 하진 않았다. 계속해서 무언가를 끄적거리고 써내려간다. 그렇다고 환상적인 이야기를 만들어 내거나, 대단한 작가를 꿈꾸는 건 아니다. 읽는 것과 쓰는 것을 손에서 놓지 않고 그냥저냥 벗하며 지내고 싶다는 작은 바람이 있다. 사실 뭐라 뚜렷하게 정의내릴 수 없는 욕망이자 습관으로 읽고 쓰고 있는 것일지도. 



'2013'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승옥 <서울 1964년 서울>  (0) 2013.09.02
세 번째 수업_수다스러운 후기  (0) 2013.08.28
최승자 <쓸쓸해서 머나먼>  (0) 2013.08.26
두 번째 수업_후기 비슷한  (0) 2013.08.26
진옥섭 <노름마치>  (0) 2013.07.19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