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 영화를 보고 나면 이상하게 뜨끔하다. 깨달음을 주는 영화도, 메시지를 던지는 영화도 아닌데 왠지 찔리고, 괜히 민망스럽다. 그러니 늘 영화관을 나서며 입 밖으로 꺼내는 말은, 홍상수 영화 속 엇비슷한 패턴의 무수한 반복처럼 "술 생각난다." 물론 어떤 술을 마실 것이냐는 영화에 따라 다르다. <누구의 딸도 아닌 혜원>을 본 날엔 막걸리를 마셨고, 이번 영화 <우리 선희>를 보고 나오니 어찌나 맥주 생각이 나던지. 점심 먹으며 가볍게 반주를 한 뒤, 막걸리와 양상추를 입장료 삼아 '언능' 오라는 주간님의 부름에 사무실로.
오랜만에 사무실로 가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비밀번호가 생각나지 않는다. 벌써 반년이 넘게 드나들지 않았으니 그럴 법도 하지만 괜히 씁슬. 그런데 핸드폰 WiFi는 자동으로 사무실 인터넷과 연결되어 있더라. 나는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그래도 네가 대신 기억하고 있었구나. 나는 스마트하지 못해.
멍게 젓갈과 양상추, 김치전과 두부부침 그리고 우리의 막걸리. 술과 안주는 충분하니 비만 다시 쏟아졌으면 좋겠구나 싶었다. 마당과 하늘이 잘 보이도록 문을 활짝 열어놓았다.
1.
라마단رمضان. '더운 달' 이라는 뜻으로 이슬람교에서 행하는 약 한 달간의 금식기간이란다. 매일 해가 떠있을 동안에만 금식을 하고 해가 진 저녁시간부터 다음날 새벽까지는 마음껏 먹고 마실 수 있다고 한다.
"새벽에 흰 실과 검은 실이 구별될 때까지 먹고 마실지니라" (코란 2장 1백 87절)
흰 실이 검은 실이 되는 그 시간, 두 실의 색이 구분이 안 될 때가 ‘이프타르(일몰 후 먹는 첫 만찬)’를 시작하는 시간.
흰 실이 검은 실이 되는 시간, 시詩적인 말이다.
내 눈물이 보이지 않는 시간, 김치전을 부치던 주간님 버전이다.
2.
홀연히, 뜻하지 아니하게 갑자기
깃들다, 아늑하게 서려 들다
3.
산다는 것, 삶이라는 직업 (파베세)
4.
동양학자 한 분이 계셨다. 적벽가를 원전 그대로 낭송해주셨다. 장시(長詩)였음에도 불구하고 막힘없어 감질나게 운율을 타며. 뜻도 모르지만 그 리듬에 함께 취하니 절로 흥이 난다. 물론 낭송 후엔 뜻풀이까지. 한시들이 술자리에서 많이 나온 데에는 이유가 있었네 그려. 모두가 흥에 취해있을 무렵엔 이백의 장진주(將進酒)를 낭송해주셨다. 들을 땐 뜻도 모르고 얼쑤, 뜻풀이를 듣고 난 뒤엔 그날의 표어, 건배 멘트가 생겼다. "會須一飮三百杯(회수일음삼백배) 마신다면 모름지기 삼백 잔이지"
술 마시는 사람만 이름을 남기니. 우리 모두 만고시름 녹여나 보세. 그리고 우리는 계속해서 술로 나아갔다. 장 진 주 將 進 酒 -
5.
달은 떴지만 내 마음은 뜨지 않았다.
설령 달빛 하나 없는 칠흙 같은 밤이더라도 나의 사랑이 없어지진 않아.
저 달이 찰 때도 있고 이지러 질 때도 있지만 절대로 사라지진 않아.
항상 보름달이지 못해서 미안해.
(이건 지난번 술자리에서 나왔던-)
6.
아름다운 산 길, 이 길을 따라 계속해서 쭈욱 걸어가면 그 끝에 그녀가 있을 것만 같았다.
잠시 ㅡ 내 눈물이 보이지 않는 시간 ㅡ
술잔의 희뿌연 막걸리, 검은 막걸리 될 때를 지켜보고자 했는데 이미 막걸리는 짙어진지 오래.
7.
흥에는 지름길이 없고,
자기 신세를 긍정하지 못하면 쪽팔린 것이고,
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놓치고 싶지 않아 메모를 해두었는데, 희미한 기억과 함께 힘을 잃은 문장만 남았다.
얼마나 마셨을 까, 300잔은 못 마셔도 30잔은 마시지 않았을까. 막걸리 10통을 훌쩍 넘겼는데.
자리를 옮겼다.
혹시나 하는 마음은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인물이 등장했고. 그 다음부터 모든 배경음악과 말들은 페이드아웃. 내 바로 앞에 앉아있던 이들이 모두 일어나 전인권의 목소리에 더덩실 춤을 추고, 커다란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악으로 이 공간과 내 몸이 꽝꽝 울리고 있었지만, 모든 것이 희미해져가더라. 동시에 선명해지는 것. 나는 고개를 들 수도, 돌릴 수도 없어 계속해서 기네스 병뚜껑을 만지작거렸다. 기네스 드래프트와 기네스 오리지널 병뚜껑은 다르게 생겼구나, 라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쪼리를 신은 그의 발등만을 하염없이 내려다보았다.
몇 시간 전 주간님이 그러셨다. ㅇㅈ가 참 밝아져서 좋아요. 그런데 왜 K는 점점 더 칙칙해지고 있지?
그래, 칙칙. 당신 발등, 발등도 칙칙쿠나. 멀어져 가고 있는 여름의 기억을 더듬어본다. 그 발등을 쓰다듬고 싶어졌다.
막걸리 거나하게 마시고, 맥주까지 마시니 모두 단단히 취했다. 나도 정말 많이 먹고 마셨는데 취하지 않았다. 조금 취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으나 취하지 못했다. 취해지지도 않는다. 슬픈 것도 취하는 것도 내 마음대로 안 된다.
만약 그 순간 어떤 노래가 흘러나왔으면 조금은 아릿하고 아름다웠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무슨 노래가 흘러나와야했을까.
당신도 알고, 나도 알고, 우리의 기억들도 아는 노래.
'너무나 평범해서 더 뻔한 노래?' '문득 선명하게 떠오르는 그때의 그때' 같은?
그들 만의 이야기가 보편이 되어버리는 것, 그래 그렇게 생각을 하는 건 정말로 '너무 슬퍼'
사실 이런 곳에서 들을만한 무엇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런 생각 다 무슨 소용이겠니. 그래도 마음 한 구석에선 뭔지 모를 것들이 자꾸 쏟아져 나온다.
2013 0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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