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웅의 <마징가 계보학>을 읽었습니다. 권혁웅 기억의 계보학이 아니었을까요. 시인은 사람들이 뜯어 버리려고 하는 삶의 음지(陰地)를 총체적으로 가지런히 정리합니다. 리어카를 끌고 수도 없이 골목을 오르내린 스파이더맨, 2대 8 가르마가 지나가는 땅딸이 이발사 아저씨 아톰, 버드나무 슈퍼의 슈퍼맨, 용구 엄마 용구 아빠와 용구, 용철이와 용숙이 드래곤 가족들.
나중에야 그게 세상 끝으로 밀려난 사람들의 운명이란 걸 알았습니다
어슴프레 서 있긴 한데 도무지 얼굴은 보이지 않는 이들 말이죠
동도극장이 꼭 그랬습니다 내가 철이 들 무렵 동도극장은 어디론가 가버렸습니다
내가 연소자 관람불가를 넘어설 때까지 기다리지 못한 거지요
나는 지금 어디든 갈 수 있지만 동도극장엔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아직 세상 끝까지 가보지 못했답니다
<세상의 끝>
아직 '세상 끝까지 가보지 못'한 시인은 세상 끝으로 밀려난 것들의 기억과 새로운 관계 맺기를 시도합니다. 그들의 삶을 대출받아 시를 쓰지요.
모든 길은 넓은 마당으로 모이고 넓은 마당에서 갈라졌다
우리는 골목에서 태어나 넓은 마당으로 갔다 우리는 거기서 걸렸다
거미인간만이 보문사와 낙산을, 배성여상과 삼선초등학교를, 나와 인자 사이를 넘나들었다
그는 자유인이었고 독재자였다
그의 많은 재산 가운데 약간을 대출받아 이렇게 쓴다
<스파이더맨>
"문학은 용기다."
치유하기보단 치유 불가능성을 확인하며 자기 삶의 자리에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힘들고, 괴롭고, 아프고, 고통스럽고, 비참했던 순간들을 단지 추억이라는 말로, 그리움이란 말로 미화시킬 순 없겠지요.
나는 주름ㅡ사람들의 동선(動線)이 그어놓은ㅡ을 잔뜩 품은 어떤 장소에 관해서, 끊임없이 현재로 소환되는 사람들에 관해서, 겹으로 된 삶에 관해서 말하고 싶었다.
내가 기억에 관해 이야기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시인의 말 中>
타인의 윤곽을 더듬는 게 쉬운 일이 아니듯, 기억의 윤곽을 더듬는 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느티와 그의 내통은 새로운 관계 맺기가 아닐까요. 시인은 모순의 깊이 속에서 쉽게 잊혀지는 것들, 보이지 않는 것들, 부정하고 싶어 하는 것들과 내통하며, 잊어버려야 할 시간을 찾지요.
그와 나 사이엔 이심전심이 있지 아버지가 뒤엎은 밥상처럼
바람이 쏴쏴 밀려나오지
그가 나와 내통할 때
내 몸의 물관과 체관을 오르는 게 있지
몰래 옷 갈아입다 들킨 누나들처럼
숨겨둔 자의식이 달아오르지
겨울에도 옷을 벗는 거지 느티는
잎들이 아니라도 무성한 거지
<내게는 느티나무가 있다 2>
어렸을 적 내가 즐겨하던 일 중의 하나는 길가에 서 있는 어느 건물의 지하실 방 안을 몰래 들여다보는 일이었다. 그 지하실에는 나무 살이 박힌 조그만 창문이 있었는데 그 창문이 어두운 지하실 안으로 약간의 바람과 햇빛을 넣어주는 단 하나의 열린 공간이었다. 길을 지나다가 나는 무릎을 조아리고 앉아서 그 통풍구 안으로 지하실 안을 들여다보았는데 그 호기심은 아마도 그 통풍구가 외부로 연결되어 있다기보다는 안쪽 깊숙한 곳으로 끌어들이는 듯싶은 모양새를 지녔기 때문일 것이다. 몰래 지하실 방안을 들여다보면서 어쩌면 나는 카나리아 새나 램프 혹은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잔뜩 기대를 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기대는 한 번도 채워진 적이 없었다. 아니, 그 기대는 내가 바라는 것과는 정반대의 방식으로 채워지곤 했다. 왜냐하면 밤이 되어 잠이 들면 마치 시선의 창끝이 뒤집어지듯 어떤 시선 하나가 그 어두운 지하실 방안에서 나를 꼼짝 못하도록 노려보는 악몽에 나는 시달리곤 했던 것이다. 꿈속에서 나를 노려보는 건 뾰족한 고깔모자를 머리에 쓴 요정들이었다. 그러나 그 요정들은 내가 놀라서 눈을 뜨자마자 벌써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그 요정들의 정체가 늘 궁금했었다. 내가 그 요정들이 누구인지를 알게 된 것은 어린이 된 뒤였다. 어느 날 나는 우연히 게오르그 세러의 '독일 동화집'을 읽다가 다음과 같은 노래를 발견했던 것이다.
포도주 한 잔을 가져오려고
어두운 지하실로 내려갔더니
그곳에 살고 있는 난쟁이 꼽추가
포도주 항아리를 내게서 빼앗아가네
나는 이 난쟁이 꼽추를 즉시 알아보았다. 어두운 지하실에 숨어 살면서 어쩌다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못된 짓거리로 피해를 주는 그런 종류의 사람들은 모두가 이 난쟁이 꼽추였다. 어린 시절 꿈속에서 나를 노려보던 고깔 요정들, 대도시의 게토에서 살아가는 거지들, 밤 깊은 공원의 나무그늘 밑에서 암탉과 수탉처럼 시시덕거리며 서로 희롱하는 불량소년소녀들ㅡ이들은 모두 이미 오래 전부터 난쟁이 꼽추의 존재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못했다. 나는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난쟁이 꼽추의 존재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
난쟁이 꼽추가 누구인지 알려준 사람은 어머니였다. 내가 실수로 물건을 깨트릴 때마다 어머니는 '재수꾼이 왔구나'라고 말씀하시곤 했었다. 그때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이제 나는 그 말의 의미를 안다. 어머니가 말한 '재수꾼'이란 난쟁이 꼽추였다. 내가 물건을 깨트렸을 때, 그 난쟁이 꼽추는 나를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난쟁이 꼽추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을 노려본다. 그 사람이 계속 난쟁이 꼽추의 시선을 의식하지 못하면, 혹은 관심을 두지 않으면, 난쟁이 꼽추는 그 사람이 실수를 저지르게 만든다. 실수를 저지른 사람은 그러나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여전히 알지 못한 채 망연자실한 눈으로 깨어진 물건들의 조각들만 쳐다볼 뿐이다.
부엌으로 가서 스프를 끓이려는데
난쟁이 꼽추가 나타나서
냄비를 부수어버렸네
실패는 내가 난쟁이 꼽추의 시선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난쟁이 꼽추에 대한 무관심 때문이었다. 그래서 난쟁이 꼽추는 자주 나의 길을 막았고 그때마다 나는 이런저런 일에 실패를 하면서 점점 더 가난해졌다. 해가 지나면서 집이 작아지고, 정원이 작아지고, 벽난로가 작아지고, 책상이 작아지고, 의자가 작아졌다. 나의 물건들은 난쟁이 꼽추가 되었고 내 인생도 난쟁이 꼽추가 되었다.
작은 방으로 들어가서
뮤슬리를 먹으려는데
난쟁이 꼽추가 나타나서
벌써 다 먹어버렸네
얼마나 자주 난쟁이 꼽추는 내게 나타났는지. 혼자 외로이 길을 막고 서서 나를 응시하고 있었는지. 그러나 나는 한 번도 그를 본 적이 없었다. 다만 난쟁이 꼽추 혼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내가 알아보지 못하면 더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러나 어찌 난쟁이 꼽추를 알아보지 못하고 인생일 보내는 이가 어디 나뿐일까. 인생은 난쟁이 꼽추들을 찍은 수많은 사진들이 모여 있는 앨범인지 모른다. 그리고 죽어가는 사람이 그가 살아온 전 생애를 파노라마처럼 본다면 그 파노라마는 이 난쟁이 꼽추들의 앨범일 것이다. 물론 그 사진들은 쏜살같이 눈앞을 스치며 사라지는 그림들이다. 하지만 그 그림을 포착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엄지손가락으로 책장을 눌렀다가 때면 아주 잠깐 동안 그 흔적이 남지 않던가. 그리고 일련의 그림들을 빠르게 넘기면 정지사진들이 마치 되살아 난 것처럼 걸어 다니고 주먹을 휘두르고 헤엄을 치는 듯이 보이지 않던가.
난쟁이 꼽추의 사진들은 나의 초상사진들일 것이다. 이제 난쟁이 꼽추는 나의 사진을 찍는 일을 그만두었다. 그는 제 할 일을 다 완수했다. 그러나 나는 난쟁이 꼽추가 찍은 나의 사진을 다시 들추어 본다. 그러면 목소리가 들린다. 가스등이 윙윙대는 것 같은 그 목소리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야 다음과 같은 구절로 들려오는 것이다.
아이야, 귀여운 아이야
제발 부탁하건데
이 난쟁이 꼽추를 위해서도
기도를 해 주렴!
ㅡ 발터 벤야민 <베를린의 유년시절>
2012.7. 21. 권혁웅 <마징가 계보학>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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