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점심 먹으러 가는데 누군가 바람에 봄기운이 실려 있다고 하더군요. 여전히 차갑지만 한겨울의 바람과는 다른 무엇이 느껴진 것이겠지요. 허수경의 시를 읽으면 늘 이런 바람 속에 있는 기분입니다. 스산한 가을바람도 한겨울의 혹독한 바람도 아닌, 서늘함 속에서 느껴지는... 따뜻하다거나 미적지근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경계 없는 봄그늘" 아래에 있는 느낌이랄까요. 슬프다, 외롭다, 아프다 하고 단언할 순 없지만 그 언저리에서 머무는 감정들이 쏟아집니다. 고립이나 침통함과는 다른. "속수무책"에 "아프고 대책 없"고 "와르르" 무너질 수밖에 없지만 그건 처절함이 아니라 살아가는 비애라고 허수경의 시詩는 말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번에 허수경의 시집을 제대로 읽지 못했습니다. 몇몇 시만 읽고는 금세 덮어버렸어요. 그의 시를 읽으면 정서적 감염이 짙어 헤어나기가 매번 힘들더군요. 그런데 그 '정서적 감염'을 무엇이라 설명하기는 어렵네요. "시 어렵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좋다, 좋은데 왜 좋은지는 모르겠다, 눈으로 읽을 땐 몰랐는데 소리 내어 읽어보니 시가 다르게 느껴진다, 함께 읽으니 혼자 읽었을 땐 미처 느끼지 못한 것들이 느껴진다…" 수업 시간에 나온 반응들, 이번에 올린 과제를 읽으면서 모두들 정서적 감염이 컸던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시를 잘(?) 읽은 거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요. 저도 2년 전 <혼자 가는 먼 집>을 읽고 글을 썼어요. 오랜만에 다시 읽어봤는데, 내가 쓴 글이라 '무를 수도 없는 참혹' 이더군요 킥킥. 추상적이다, 안개를 헤매다가 나온 기분일 뿐 정서적 공감이 어렵겠는 글이라는 얘길 듣고 열심히 퇴고해보려 했지만... '자신의 불우를 다해 노래'하지 못하고 감염된 정서에 실려 떠다닐 뿐 그 무엇도 깊이 응시하지 못한 글이었어요. 시를 읽을 땐 이 '정서적 감염'이 중요하지만, 감염에서 그치지 않고 '감응'하기 위해선 나의 감정을 지그시 응시해보아야겠지요.



       


              빛 속에서 이룰 수 있는 일은 얼마나 많았던가 이를 테면

       시간을 거슬러 가는 일, 시간을 거슬러 가서 평행의 우주까지 가는 일


              그곳에서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태어나지 않는다

              그곳에서 나는 내 어머니에게서 태어나지 않는다

              나는 다른 부모를 가지고 다른 이름을 가지고

              내 육체는 내가 가진 다른 이름을 이루어내고


              그곳에서 흰빛의 남자들은 검은빛의 여자들에게 먹히고

              (그러니까 내가 살던 다른 평행에서는 거꾸로였어요, 검은 빛의 여자를 먹는

              흰빛의 거룩한 남자들이 두고 온 고향으로 돌아가는 꿈을 자꾸 꾸며 우는 곳이었지요)


              나는 내가 버렸던 헌 고무신 안에

              지붕 없는 집을 짓고 무력한 그리움과 동거하며

              또 평행의 우주를 꿈꾸는데

              그러나 그때마다 저 너머 다른 평행에 살던 당신을 다시 만나는 건 왜일까,

              그건 좌절인데 이룬 사랑만큼 좌절인데

              하하 , 우주의 성긴 구멍들이

              다 나를 담은 평행의 우주를 가지고 있다면


              빛 속에서 이룰 수 없는 일은 얼마나 많았던가 이를 테면

       시간을 거슬러 가서 아무것도 만나지 못하던 일, 평행의 우주를 단 한 번도 확인할 수 없던 일



              허수경, <빛 속에서 이룰 수 없는 일은 얼마나 많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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