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년 여름 군대 간 동생에게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보내줬다. 모든 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어 단테의 신곡에 나온 지옥을 여행하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는 동생은, 책을 읽고 마치 '전일병의 하루'를 보는듯하다고 했다. 몇 주 뒤 우편함엔 두툼한 편지봉투 하나가 들어있었다. 배급받은 보통 사이즈의 공책을 뜯어 단 한 줄도 낭비하지 않고 뒷장까지 빼곡히 채운 13장의 편지. 동생은 군대 생활하며 느낀 짜증난다, 괴롭다, 힘들다, 집에 가고 싶다 같은 압축된 감정들을 글로 쏟아냈다. 자기 안에 쌓인 모든 것들을 다 털어낼 수 있는 수단이 지금으로썬 쓰는 것 밖에 없다며 "난생 처음 써보는 엄청나게 긴 한풀이가 되겠지만 끝까지 읽어주길 바랍니다"로 시작한 편지. 나는 처음으로 군대 다녀온 누군가의 이야기를 집중해서 읽었다.

 

이야기를 해야 할 필요성을 참을 수 없을 만큼 강렬히 느꼈기 때문에 나는 그곳, 독일 연구실에서, 추위와 전쟁 속에서, 감시의 눈초리를 피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최선을 다해 급히 써놓은 그 메모들을 어떤 식으로 간직해야 할지 알 수 없었고 그 메모 때문에 목숨이 위태로운 순간이 오면 당장 그것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말이다. 몇 달 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글을 썼다. 그럴 수밖에 없을 정도로 그때의 기억들이 내 마음속에서 뜨겁게 타올랐기 때문이다.


고통스러운 감정은 우리가 그것을 명확하고 확실하게 묘사하는 바로 그 순간에 고통이기를 멈춘다, 라고 스피노자가 말했던가. 그들은 자신의 경험을, 현재 겪고 있는 상황을 쓸 수밖에 없었기에 쓴 것이다. 육체적인 고통이 사라지는 것도 아닐 테고 고통스러운 감정의 멈춤은 일시적인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는 순간만큼은 심판관이 아닌 증언자, 174517번이 아닌 '프리모 레비'가 되는 것이기에.



 2

마지막에 장교가 물었다. "Wieviel Stuck?"(몇 개) 그러자 하사는 단정하게 경례를 붙인 뒤 650 ''이며 모두 준비가 되었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들이 우리를 버스에 태워 카르피 역으로 데려갔다. 거기서 우리는 최초의 구타를 당했다. 너무나 생소하고 망연자실한 일이어서, 몸도 마음도 아무런 통증을 느낄 수 없었다. 단지 무척 심오한 경이로움만을 느꼈을 뿐이다. 어떻게 분노하지 않고도 사람을 때릴 수 있을까?   기차는 열두 량이었고 우리는 650이었다.


사람을 세는 단위 '명', 물건을 사는 단위 '개'. 두 단위의 차이가 이렇게 크게 느껴지다니. 그들은 끊임없이 교체되면서도 늘 똑같은, 침묵 속에 행진하고 힘들게 노동하는 익명의 군중·비인간들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우리는 한 '명'의 인간으로 살고 있는 것일까? 핑크 플로이드의 앨범을 영화로 만든 <The Wall>에선 가면을 쓰고 책상에 앉아 컨베이어 벨트에 실려 가던 학생들이 기계 속으로 떨어지면서 똑같은 소시지가 되어 나오는 장면이 나온다. 금니와 머리카락을 뽑고 수레에 실어 (나중에는 컨베이어벨트를 사용하기도 했다)소각로로 운반된다. 규율과 통제 속에서 표준적인 삶으로 동일화 되는 아이들은 고기 덩어리가 되고, 그 속에서 기본적인 권리마저 빼앗긴, 영혼이 먼저 죽은 이들은 금니 몇 '개'와 머리카락 몇 '올'이 되어버린다. 이것이 인간인가? All in all it was just bricks in the wall 학교, 직장, 가족, 성(性), 종교, 국가, 권력(파시즘). 우린 그 모든 벽 속의 또 다른 벽돌일 뿐이다.


그러나 벽을 뚫고 나오기 위해서 레비가 간직하고 있던 건 지칠 줄 몰랐던 인간에 대한 관심이었다. 암흑과 같은 시간에도 내 동료들과 나 자신에게서 사물이 아닌 인간의 모습을 보겠다는 의지, 그럼으로써 수용소에서 널리 퍼져 많은 수인들을 정신적 조난자로 만들었던 굴욕과 부도덕에서 나를 지키겠다는 의지. 그렇기에 쓸 수밖에 없었던, 말을 계속해서 하고 또 해야만 했던 레비가 나는 슬프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3

쉰들러 리스트, 인생은 아름다워, 피아니스트,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 안네의 일기, 카운터 페이터…. 홀로코스트를 다룬 영화들은 지금까지 수 없이 많이 나왔고, 많이 보았고. 앞으로도 많이 나올 것이다. 나는 쉰들러의 용기에 감탄했고, 아들을 위한 귀도의 숨바꼭질 놀이에 감동했으며, 절망과 공포 속에서 스필만이 연주한 쇼팽의 녹턴을 기억하며, 수용소에 들어가기 위해 줄무늬 잠옷을 입은 브루노를 잊지 못한다. 그런데 그 다음은? 홀로코스트의 참상을 이렇게 스크린 속에서 잠시나마 감동 혹은 슬픔이나 반성 같은 단어들로 뭉그러뜨려 소비하고 있던 것은 아닐까.


물자 부족, 노역, 허기, 추위, 갈증들은 우리의 몸을 괴롭혔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정신의 커다란 불행으로부터 신경을 돌릴 수 있게 해주었다. 우리는 완벽하게 불행할 수 없었다. 수용소에서 자살이 드물었다는 게 이를 증명한다. 자살은 철학적 행위이며 사유를 통해 결정된다. 일상의 절박함이 우리의 생각을 다른 곳으로 돌려놓았다. 우리는 죽음을 갈망하면서도 자살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수용소에 들어가기 전이나 그 후에는 자살에, 자살할 생각에 가까이 간 적이 있다. 하지만 수용소 안에서는 아니었다.


스스로 선택하는 죽음조차 생각할 수 없었던 그곳에서, 영혼의 죽음이 먼저 일어나는 그곳에서 살아 나온 레비는 자살한다. 왜? 라는 질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40년이나 지난 시점에서 무엇 때문에? 잊혀지지 않는 수용소에서의 기억 때문에? 그 고통과 트라우마 때문에?


레비는 보았다. 새 옷을 입고 다시 나타나기 위해 변신을 꾀하고 있는,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파국에서 벗어난 새로운 세계에 걸맞게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그 무엇을. 알고 싶지 않기 때문에 알지 못하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환상을 가진 사람들 속에서,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고의적인 태만함을 가진 사람들 속에서. 그것은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자본이라는 이름으로, 학벌이나 스펙, 경쟁, 비정규직 해고, 뉴타운, 효율과 합리성 같은 이름으로 우리의 영혼을 갉아 먹고 있다. 레비의 글은, 레비의 죽음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하고 있다.

지금 의심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2013'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2 <4천원 인생> 안수찬 외  (0) 2013.02.09
이야기하기 위해 살다  (0) 2013.02.09
2012 문태준 <가재미>  (0) 2013.02.09
스테판 말라르메 <시집>  (0) 2013.02.08
<고백록> 장 자크 루소  (0) 2013.01.07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