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2월 갑작스럽게 자취를 하게 되었다. 내가 혼자 살게 될 집임에도 불구하고 이사 날, 그것도 모든 가구와 짐들이 도착하고 나서야 처음으로 가보았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세상 한 복판에 나와 살게 된 것이 무섭고 싫었다. 외진 골목의 계단이 가파른 다세대 주택 2층이라는 것이 싫었고, 현관문이 철문이 아닌 반투명 유리문인 것이 싫었다. 화장실에 세면대가 없는 것도 싫었지만 무엇보다 싫었던 건 그곳이 거마지구라는 것이었다.
송파구의 가장 남쪽에 위치한 거여동과 마천동은 경기도에 속하다가 80년 대 들어 서울특별시로 편입되었는데 그 후 서울시내 무허가 판잣집 철거민들이 이주하면서 형성된 동네다. 엄연히 송파구 임에도 불구하고 거마지구라 불리며 송파구 내에서도 굉장히 배타적인 이곳은 재개발 대상구역이지만 그 목록에서조차 제일 끝에 있다. 집값이 저렴하니 작은 규모의 공장들이 세워졌고, 그에 따라 이주민노동자들이 여기저기 둥지를 틀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어색하게 정장을 빼입고 '거마 대학생' 이라 불리는 다단계에 빠진 청년들이 골목골목을 장악했다.
다른 무엇보다도 거마지구 소외에 크게 한 몫 한 건 다리였다. 거여동 초입에 있는 고가다리. 판교와 구리를 잇는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다. 송파구 26개의 동을 24개와 2개로 구분 짓는 다리. 송파구의 슬로건 '살기 좋은 송파'에 의문을 던지게 만드는 다리. 이 7층 건물 높이의 고가다리 그림자는 늘 한쪽으로만 기울어져있었다. 언젠가부터 송파구 관련 뉴스에서 거마지구가 우범지대라는 기사를 심심찮게 보게 되었다.
원래 야행성이기도 했지만 단순 야행성에서 '초 예민' 야행성이 되었다. 밖에서 들리는 나뭇잎 바스락 거리는 소리에도 소스라치게 놀랐다. 새벽마다 들리는 고양이 소리도 한 몫 했다. 처음엔 옆집 아기 울음소리인 줄 알았다. 주인집 아주머니가 옆집엔 갓난아기 키우는 부부가 산다고 했었기에. 이사한지 한 달이 지나서야 옆집 부부와 우연히 마주쳤다. 갓난아기를 키우고 있는 게 아니라 임신 중인 걸 알았을 때 나는 환한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러나 사람의 적응력은 대단하다. 그리 잔뜩 겁을 집어먹었던 게 민망해질 만큼 나의 적응력은 빨랐다. 우선 혼자서 밥을 먹고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는 것에 익숙해졌다. 내 삶에 익숙해지고 생활패턴이 안정을 되찾자 살고 있는 집이 보였고, 골목이 보였고, 주변 세탁소며, 슈퍼며, 분식집이 보이기 시작했다. 워낙 외진 골목이라 편의점은 없었지만 편의점 대신 24시간 운영하는 '동네 슈퍼(이름이 정말 동네슈퍼이다)'가 있었고 운동장 모래뿐인 줄 알았던 집 앞 공원엔 산책할 수 있는 길도 있다는 걸 알았다. 무섭기만 했던 고양이를 봐도 이젠 더 이상 놀라지 않았고 까치밥 남겨 놓듯이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분리수거를 하는 날에 참치 캔은 따로 한 구석에 갖다 놨다. 무섭기만 하고 경보하듯 걸었던 골목길을 슬리퍼 신고 터벅터벅 걸을 수 있게 되었고,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는 것만 같아 서있기도 싫었던 버스 정류소 앞 스테인리스 공장의 이주민 노동자 아저씨들과도 언제부턴가 눈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날이 따뜻해지기 시작하니 사람들이 다리 밑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동네 조기 축구나 족구회 아저씨들은 비가 오는 날이면 다리 밑에서 운동을 했다. 아이들은 다리 기둥에 낙서하기 바빴다. 누군가는 몰래 가구를 내다버리기도 했고, 누군가는 버려진 가구를 가져가기도 했다. 이주에 한 번 동네에는 부추 냄새가 진동을 했다. 다리 밑에서 동네 할머니, 아주머니들이 모여 소일거리로 부추 다듬기를 하고 계셨다. 차광막 치고 돗자리 깔고 앉아 오늘 안에 저걸 다 다듬을 수 있을까 싶은 양의 부추를 열심히 다듬고 계셨다. 다리의 그림자는 늘 한쪽으로만 기울어져 있었지만 그 안에서 누군가는 삶의 터전을 만들고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었다.
+ 거의 매일 지나다니는 송파구 잠실은 요즘 불야성(不夜城). 낮, 밤 구분 없이 항상 밝기만 하다. 야구시즌인 만큼 한쪽에선 잠실 야구경기장 조명탑으로 밝고, 한쪽에선 제 2롯데월드 공사장 조명탑 때문에 밝다. 높이 555m, 지상 123층은 얼마만큼 높은 건지 상상도 안 된다. 분명한 건 그 높이만큼 드리워질 그림자 속에서 누군가는 삶의 터전을 만들어가고, 하루하루를 살아내야 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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