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2월17일에 처음으로 시 세미나에 참석해서 장정일의 <햄버거에 대한 명상>을 읽었어요. 바로 그 다음 주인 24일, 크리스마스 파티를 한다기에 어색해서 어쩌나, 걱정했는데 시와 노래와 함께 따뜻하게 보냈던 기억이 나네요. 그날의 후기를 제가 썼고요, 일 년 뒤 12월22일 시 세미나 송년의 밤도 제가 후기를 쓰게 되었네요. 오락 부부장(?), 그 운명의 데스티니?


고은, 소영, 소영의 그 지혁, 지선, 바람도리, 금철, 다영, 은진, 은유, 말미, 그리고 저까지.

시 세미나 두 번째 송년의 밤을 기념하여 준비한 케잌에 촛불 켜고 캐롤 한 곡 부르면서 시작했어요. <루돌프 사슴코>, 은근히 긴 이 노래를 다 부르고 나서 생각해보니 우리 시 세미나의 노래로 정말 딱 이더군요. "다른 모든 사슴들, 놀려대며 웃었네. 가엾은 저 루돌프, 외톨이가 되었네" 약자를 위한 언어, 詩. 외톨이가 된 루돌프를 위한 캐롤. 루돌프 귀걸이를 하고 온 은유샘이 캐롤의 심오한(?) 의미를 짚어주며 본격 세미나 시작했지요.




거칠고 별 많은 하늘 아래

무덤을 파고 나를 눕혀주오

기쁘게 나는 살았고 기꺼이 죽는다

그리고 나는 유언을 가지고 눕는다

이것은 당신이 나를 위해 새길 시이다:

“여기 그는 그토록 갈망했던 곳에 누웠다.

선원이 바다에서 바라던 가정

사냥꾼이 언덕에서 바라던 가정.”


 스티븐슨 <진혼곡Requiem>



학교 졸업할 때 즈음 읽고 영문학 공부 제대로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해주었던 책, 보르헤스의 강연을 기록한 『보르헤스, 문학을 말하다』 그 책에 있는 여러 시 중 스티븐슨 <진혼곡>을 은유샘이 읽어주었지요. 다시 읽어봐도 home은 가정이라는 번역보단 집이 좋을 듯 하네요.


우리는 왜 시를 읽을까요? 보르헤스가 그 이유를 들려주는 듯 합니다.



“논증은 아무도 납득시키지 못한다.” (에머슨)

말하고자 하는 바가 논증으로 제시되기 때문에, 그것은 아무도 납득시키지 못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그것을 관찰하고 저울질해 보며 뒤집어 보고 나서는 그것에 반대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러나 무언가가 단지 이야기되거나 또는ㅡ훨씬 더 좋게ㅡ암시만 된다면, 우리의 상상력에는 뭐랄까 환대의 태도가 생겨납니다. 우리는 그것을 수용할 준비를 갖춥니다. 저는 약 30년 전에 마르틴 부버의 저서를 읽었는데요. 그 때 저는 그 작품들을 훌륭한 시라고 생각했답니다. 그 후 제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갔을 때, 저는 제 친구인 두호브네의 책을 읽었는데, 놀랍게도 마르틴 부버가 철학자이며 그의 모든 철학은 제가 시로 알고 있었던 책 속에 담겨 있습니다. 부버의 책들이 제게 시를 통해서, 암시를 통해서, 시의 음악을 통해서, 그리고 논증이 아닌 것으로 다가왔기 때문에, 아마도 제가 그 책들을 수용했을 것입니다. 월트 휘트먼의 시 어딘가에서도 이와 동일한 생각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이성의 개념은 설득력이 없다고, 어디엔가 그는 밤공기, 몇 개의 커다란 별들이 단순한 논증보다 훨씬 더 설득력이 있음을 깨달았다고 말합니다.





금철은 책을 한 권 추천해주었어요.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의 『시적 인간과 생태적 인간』 주변의 흐름에 휩쓸려 살아가고 있다고 느꼈을 때, 더는 이렇게 살면 안 된다고 싶었을 때, 내 삶의 ‘지향점’으로 삼고 싶었던 책이었다고 해요. 이 책을 읽고 처음으로 시를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요. 금철의 첫 시,



내 마음 언제나 나무처럼 어디에 붙박여 있는 것도

그러다 또 야생동물처럼 어디론가 떠나가고 싶은 것도

한 줌 흙으로도 풀 한 포기 키우고 벌레 한 마리 잠재우는

우리별의 살가운 사랑 때문이지

또한 그 별의 한 조각인 내 출렁이는 열망 때문이지

수십억 년 전 별과 내가 한 개 세포였을 적부터

한 점 빛이었을 때부터


 조향미, <내가 천천히 음미하며 걸을 수 있는 것은> 중에서






금철의 뒤를 이어 읽어야 할 것만 같았던 진스님의 책 『지금은 자연과 대화할 때』 

인디언 연구가 서정록 씨가 쓴 책이에요. 체로키 족의 식물학자이자 시인인 노만 러셀의 시 <바람을 열기>를 소개해주었어요.


숨 쉴 때마다

우리는 원을 만든다

그리고 그 원 속에서

나를 바라본다 세상을 바라본다

숨쉴 때마다

우리는 바람의 일부가 된다

그리고 바람의 목소리를 빌려

우리의 노래를 부른다

바람을 탄 노래는 안으로 감기며

끝없이 퍼져 나가고

나는 너의 일부가 되고

너는 나의 일부가 된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가 된다

……


진스님의 자작시와 함께 토끼털 목도리와의 이별식도 했지요. 채식과 모피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었어요. 싸늘하게 식어버린 심장이 누군가의 목을 따뜻하게 해주고, 누군가의 배를 부르게 해주고. 세상엔 알면 하지 못할 일들이 참 많죠. 몰라서 못하고, 알려하지도 않고. 단순히 육식은 나쁘고, 채식은 옳다, 같은 이분법적인 구도로는 판단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문제 같아요. 저도 반려견과 함께 하면서부터 채식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해봤지만 아직까지 고민, 아니 그냥 생각하는 정도에서만 머무르고 있네요. 채식, 육식이 아닌 그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요.






이성복 시를 관통하는 키워드 '치욕' 그 시에 담겨 있는 생의 치욕이 내 삶과 만나 나의 시가 된, <물과 빛이 끝나는 곳에서>를 바람도리님이 읽어주었어요. 이해하면서 읽는 게 아닌 직관으로 읽었을 때 내 속의 감각들을 자극하는 그의 시를 두고 김현은 '치욕의 시적 변용'이라고 했죠.



물과 빛이 끝나는 곳에서 종일 바람이 불어 거기 아픈 사람들이 모래집을 짓고 

해지면 놀던 아이들을 불러 추운 밥을 먹이다

잠결에 그들이 벌린 손은 그리움을 따라가다 벌레먹은 나뭇잎이 되고 

아직도 썩어 가는 한쪽 다리가 평상 위에 걸쳐 누워 햇빛을 그리워하다



물과 빛이 끝나는 곳에서 아직도 나는 그들을 그리워하다 발갛게 타오르는 곤충들의 겹눈에 붙들리고, 

불을 켜지 않은 한 세월이 녹슨 자전거를 타고 철망 속으로 들어가다

물과 빛이 닿지 않는 곳에서 사람들의 얼굴은 벌레 먹은 그리움이다 

그들의 입 속에 남은 물이 유일하게 빛나다






조용히 술을 홀짝홀짝이던 지혁은 자신의 첫 시를 외워 낭독해주었어요. 역시 문동오빠! 김춘수의 <꽃> 고등학교 1학년 자습실에서 언어문제집을 풀다가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던 시라죠. 지난번에 김춘수 시집 읽을 때 함께 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워요. 소영 따라 자주 나오시길.


그리고 감기약으로 헤롱헤롱 하던 다영이 가방에서 꺼낸 시집 4권은 모두 최승자 시집이었어요. 지난 글쓰기 수업 때 그의 시를 읽고, 시의 언어에 감탄했다죠. 그때부터 생각날 때마다 시집을 찾아 읽고 있구요. 그런데 올 해 다영이 시험 준비를 하면서 “정말 미추어버리는 줄 알았어요” 할 때마다 최승자의 시를 읽었다고 해요. 언제 읽어도 늘 새롭게 다가오는 시. 

소영의 신청 시 <20년 후에 芝에게>와 ㅇㅈ의 신청 시 <올 여름의 인생 공부>도 함께 읽어주었지요.



……

어디에도 없는 너를 피해

언젠가 다시 한번

너를 만나러 가마

언젠가 다시 한번

내 몸이 무덤에 닿기 전에

(이 세계의 낯선 모퉁이에서

네가 나를 기다리고 있기에)

 <언젠가 다시 한 번>




이상하지,

살아있다는 건,

참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일이란다

 <20년 후에 芝에게>



"누군가 내 삶을 대신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해서 시를 읽는 게 아닐까요, 하는 이야기가 나왔어요. 

지금의 외로움이 더 이상 나만의 외로움이 아니란 걸 느낄 때. 저릿, 하게 올라오는 따스함.






신형철은 "젊은이들이란 자신의 삶이 비극이라고 믿는 버릇을 갖고 있지만, 감히 그 비극을 완성할 용기는 갖고 있지 않은 치들"이라 말하고, 박민규는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서 "청춘은 고장 난 탱크와 같다. 돌이켜 보면, 우리는 누구나 그런 모습으로 내일의 문 앞에 서있었다."라고 말하죠.


사람들이 찾는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삶, 젊음, 청춘, 20대… 여러 가지 떠오르는 표상들 속에서 스스로 찾아야 할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요. 아니 무엇으로 정리되는 삶이 있을 수 있을까요. 삶의 의미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하고 있는 소영의 첫 시.



지금도 그 이유를 모르지만

젊은 시절에도 나는 젊지 않았어

때때로 날은 흐리고

저녁이면 쓸쓸한 어둠뿐이었지

짐 실은 소처럼 헐떡였어

그 무게의 이름이 삶이라는 것을 알 뿐

아침을 음악으로 열어보아도

사냥꾼처럼 쫓고 쫓기다 하루가 가고

그 끝 어디에도 멧돼지는 없었어

생각하니 나를 낳은 건 어머니가 아니었는지도 몰라

어머니가 생명과 함께

알 수 없는 검은 씨앗을 주실 줄은 몰랐어

지금도 그 이유를 모르지만

젊은 시절에도 늘 펄펄 끓는 슬픔이 있었어

슬픔을 발로 차며 거리를 쏘다녔어

그 푸르고 싱싱한 순간을

함부로 돌멩이처럼


문정희, <기억>






고은샘은 쿠바 작가 레오나르도 파두라의 단편 <알보라다 알만사의 복에 겨운 죽음>과 정호승 시인의 <부도밭을 지나며>를 출력해서 나누어주셨어요. 다들 읽어보셨나요? 남미 문학 특유의 마술적 리얼리즘이 가득한 이 단편소설은 저도 예전에 기출 문제 풀어보다말고 빠져들어 열심히 읽었던 기억이 나요.


정윤천 시인의 <천천히 와> 우리 모두 퀴즈퀴즈로 풀었죠. 고등학교 국어시간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었어요. 늘 최선을 다해 수업준비를 하는 여리고 따뜻한 고은샘을 국어선생님으로 둔 학생들이 무척 부러워요.


'내 껍질은 연약하나 마음은 단단하다'

그동안 시를 학교에서 배운 주입식 교육 방식 이상으로는 읽지 못했고, 읽으려 하지도 않았죠. 시 세미나를 하면서도 교과서에서 혹은 문제집에서 봤던 시가 나오면 제대로 읽으려 하지 않았던 거 같아요. 고은샘은 예전엔 속상한 맘뿐이었는데, 지금은 이해와 관용의 마음으로 좀 더 품어주려고 한다면서 정호승 시인의 <달팽이>를 읽어주었어요.



죄없는 소년이다

소년이 무심코 나를 밟고 간다

아마 아침이슬인 줄 알았나 보다



천천히, 그리고 단단하게.






그리고 금철이 소개해 준 '시와'의 <나의 노래>




슬피 바래는 마음만이 그를 좇아

내 노래는 벗과 함께 느끼었노라


시인 오장환의 작품을 노래로 만든 음반 "시인 오장환을 노래하다"중에서.






핸드폰 잃어버리고 갑작스런 착신 정지로 우리 모두를 걱정하게 만든 지선(그대는 사랑받고 있소 음하하)이 들려준 

장기하 <그때 그 노래>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심했지

이게 그 때 그 노래라도 그렇지

달랑 한 곡 들었을 뿐인데도 그 많고 많았던 밤들이

한꺼번에 생각나다니



달랑 한 곡 들었을 뿐인데도 그 많고 많았던 밤들이 한꺼번에 생각나고,

달랑 시 한 편 읽었을 뿐인데도 나도 모르게 숨어있던 감각들이 한꺼번에 깨어나죠.







차를 모는 동안 졸음이 와서 길옆의 나무 아래로 밀고 들어갔다.

뒷좌석으로 굴러들어가 잠들었다. 얼마 동안? 몇 시간 동안. 어둠이 와 있었다.

나는 갑자기 잠이 깨었고, 내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의식이 충분히 돌아왔지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는 어디에 있지? 내가 누구지?

나는 막 뒷좌석에서 잠깨어 마대자루 속의 고양이처럼

공포에 질려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그 무엇! 내가 누구지?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나의 삶이 내게로 돌아온다.

나의 이름이 천사처럼 돌아온다.

성벽 바깥에는 레오노라 전주곡처럼 트럼펫 소리가 들리고,

나를 구출해줄 발걸음들이 긴 계단 아래로 신속히 다가온다.

내가 오고 있어! 내가!

하지만 자동차들이 불을 켜고 미끄러져 지나가는 간선 고속도로에서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 무(無)의 지옥 속의 15초 전투를 잊을 수 없다.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이름>



영하의 날씨에도 땀을 뻘뻘 흘리며 일을 하고 있는 말미는 완전히 자기 자신이 사라지는 순간에 대해 이야기 했어요. 짐을 나르고 있는 내가 아닌, 나르는 동작 그 자체가 되어버리는 순간. 저도 얼마 전까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비슷한 느낌을 받았던 거 같아요. 크게 힘을 쓰는 일은 아니었지만 1년 가까이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업무를 단순 반복하다보니 어느 순간 무아지경이 되어 시간도 공간도 나도 잊은 채 그 일을 하고 있더군요. 정신을 차렸을 땐 그날의 업무가 끝나있었고요. 내가 완전히 사라지고 동작 그 자체가 되어버리는 순간 나를 죄어오던 공포. "공포에 질려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그 무엇! 내가 누구지?"






그리고 ㅇㅈ의 노래, 어떤날 <오후만 있던 일요일>




오후만 있던 일요일 눈을 뜨고 하늘을 보니

짙은 회색 구름이 나를 부르고 있네

생각 없이 걷던 길옆에 아이들이 놀고 있었고

나를 바라보던 강아지 이유 없이 달아났네



알람 없이, 눈이 저절로 떠지는 새벽. 서서히 밝아올 때까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누워만 있는 시간. 아무 것도 보려 하지 않고, 아무 것도 들으려 하지 않고, 아무 것도 말하려 하지 않고. 아무 것도 하지 않음을 위한 시간, 아니 시간이라는 단어조차 떠오르지 않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음 그 자체.

저는 여가 시간을 즐기는 게 아니에요. 여가 시간이라 생각한 적도 없고요. 그렇다면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 걸까요? 요즘 말로 잉여짓을 하고 있는 걸까요? 아무 것도 생산하지 않고 아무 것도 성취하지 않는 시간. 언어화 되지 않는 시간. 그 때에 느끼는 것들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지선은 여행 갔을 적 동굴 속에서 그렇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누워만 있었던 이야기를 해주었고, 말미는 인간에게는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고 강력히 말해주었어요. 이런 순간들을 무위의 시간들을 붙잡지 않고 사로잡지 않고 개념화하지 않고 말할 수 있는 건 문학이고, 그래서 문학이 좋다고 했지요.




원래 이번 주 읽으려고 했던 『불은 언제나 되살아난다』에 실린 김남주 시인의 <학살 1>을 읽으며 시 세미나 송년의 밤을 마무리 했어요. 쉽게 망각하게 되는, 그러나 망각해서는 안 될 것들을 계속해서 일깨워주는 역할 또한 시가 해주고 있지 않나 생각해보네요.




다음 주는 시 세미나 시즌 4 마지막 시간. <김우창 전집1: 궁핍한 시대의 시인> (민음사)

김우창 선생님의 평론집을 읽어요. 각자 발제 맡은 부분 기억하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음하하. 

2012년의 마지막 토요일 6시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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