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키츠 시의 저 도도(滔滔)한 시행들을 음미하고 있던 순간에, 저는 아마도 제 아련한 기억을 선히 떠올리고만 있었겠지요. 아마도 제가 키츠의 시들로부터 끌어냈던 진정한 설렘은 아버지가 그 시들을 큰 소리로 낭송하는 것을 처음 들었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의 제 어린 시절에, 저 아득히 먼 순간에 싹텄을 것입니다. 그리고 시, 언어가 의사소통의 매체일 뿐만 아니라 열정과 즐거움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을 때, 저는 그 시어(詩語)들을 이해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무언가가 저에게 일어나고 있었다고 느꼈답니다. 그것은 한낱 저의 지성에서가 아니라 저의 전 존재, 저의 살과 피에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보르헤스, 문학을 말하다> 중에서



위대한 개츠비를 세 번 이상 읽은 사람이면 나와 친구가 될 수 있다. '삼국지를 열 번 읽은 자와는 논쟁을 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며 누렇게 뜬 메주 같은 이문열의 삼국지 시리즈를 읽으라던 엄마의 잔소리가 생각나는 저 문장이 나를 이상하게 자극했다.


그렇구나, 이렇게 진도가 나가지 않는 책이라서, 그만큼 어려운 책이라서, 제목만큼 위대한 책이라서 세 번 이상 읽은 사람만이 일본 최고의 작가라는 무라카미 하루키와 친구가 될 수 있나보구나. 책을 사고 일주일 정도 씨름을 한 뒤 다른 책으로 교환해 버렸다. 소장하고 있다가 나중에 다시 읽어봐야지 하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리고 일 년 뒤 쯤 서점에서 책을 고르던 중 그 제목과 다시 마주쳤다. 오랜만이야, 여전히 같은 자리에 꽂혀있네, 넌 그런 존재였을 뿐이야. 그런데 뭐, 시간도 꽤 지났으니 우리 한 번 제대로 다시 만나볼까. 그 자리에 주저앉아 읽기 시작했다. 한 시간 정도가 지났을까 무의식적으로 책장만 넘기고 있음을 깨닫고 너랑 나는 역시 아닌가보다 하고 책을 덮었다. 그리고 또 일, 이년이 흘렀을 것이다. TV채널을 돌리다 보게 된 미드에서 주인공이 위대한 개츠비의 작가 피츠제럴드의 단편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를 극찬하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 절대로 공감할 수 없는 삶을 살고 있는 미드의 주인공조차(그녀의 역할은 재벌2세이다) 극찬하는 저 작가는 대체 누구란 말이냐. 다음날 도서관으로 달려가 개츠비는 잠시 잊고 그의 단편집을 빌렸다. 잘 읽었느냐고? 기억나는 제목조차 없다. 끝까지 읽지 못했음은 당연하다. 이 작가는 나와 맞지 않아. 한 문장으로 깨끗이 포기했다.


또다시 일 년 정도가 지난 것 같다(시간은 잘도 흐른다). 2학기 강의 계획서를 보던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1900년 대 미국문학 -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끊어지지 않는 붉은 실로 연결 된, 꼬이고 꼬였지만 결국 만나게 될 그런 운명이었던 것인가, 우린? 수업을 위해서, 시험 점수를 위해서라도 읽어야만 했다. 비장한(?) 마음으로 책을 사서 읽기 시작했다. 아주 매끄럽게, 막혔던 변기물이 변기뚫어 펌프질로 한 방에 내려가듯 읽었다. 그동안 왜 이렇게 읽지 못하고 절절 맸던 것일까. 이번 학기 공부한 4편의 작품 중 위대한 개츠비를 에세이 주제로 선택할 만큼 할 말이 많은 소설이었는데 말이다. 사실 서문이 길었다. 몇 년 만에 한글을 깨우친 아이처럼 이 책을 술술 읽게 된 것이 그만큼 나에게 신기한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수업시간 내내 묘한 쾌감을 느꼈다.


원서로 수업하던 중 교수님이 이 소설 중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인 장면으로 뽑힌다는, 문체, 구조, 묘사 너무도 완벽해서 미국대학의 문학시간에는 꼭 한 번 필사를 하고, 이와 같은 구조의 글쓰기가 작문시간 과제로 나간다는 6장의 마지막 부분을 읽어주셨다. 교수님의 목소리가 특별히 좋았기 때문도, 영어 발음이 좋아서도 아니었다. 저 밑에서부터 뜨거운 무엇인가 올라오고 있었다. 하나하나의 단어에 맞추어 천천히, 아주 천천히.... 누군가 옆에서 손끝으로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렇게 공감되지 않던 개츠비의 삶에, 그의 말과 행동들에 무한한 이해와 공감과 애정을 쏟아내고 있었다. 내가 그 문장들을 이해하고 있었을까? 나의 영어 (듣기)실력은 그렇게 좋지 않다. 어떤 특정단어가 들렸던 것도 물론 아니다. 번역본을 먼저 읽었기에, 영화로도 보았기에 그 장면이 이해되고 떠올랐기 때문이었을까? 생각나지도 않았다. 낭독이 끝난 뒤 교수님 설명으로 어떤 장면인지 알게 되었다. 나중에 그 장면을 다시 읽었을 땐 그때와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없었다. 이 글을 쓰면서 다시 한 번 읽었지만 마찬가지였고, 번역본을 읽으니 그때의 경험이 더욱 신기하게 느껴진다.



"(…) 개츠비는 곁눈질로 보도블록이 실제로 사다리가 되어 나무 위쪽 비밀 장소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만약 혼자 오른다면 그는 그 비밀 장소까지 올라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일단 그곳에 다다르면 생명의 젖을 빨고 그 무엇에도 견줄 수 없는 신비의 우유를 들이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별에 부딪힌 소리굽쇠가 내는 아름다운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잠시 기다렸다. 그러고 나서 그는 그녀에게 키스를 했다. 그의 입술에 닿자 그녀는 그를 위해 한 송이 꽃처럼 활짝 피어났고, 비로소 화신이 완성되었다."



생명의 젖(pap of life), 신비의 우유(milk of wonder)라는 표현은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이것이 아마 보르헤스가 말한 의사소통 매체로서의 언어 그 이상의 무엇이 아니었을까.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저는 그 시어들을 이해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무언가가 저에게 일어나고 있었다고 느꼈답니다. 그것은 한낱 저의 지성에서가 아니라 저의 전 존재, 저의 살과 피에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 그것은 한낱 나의 지성 혹은 영어 실력에서가 아니라 나의 전 존재, 나의 마음 깊숙한 어딘가 에서부터 끓어올라오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지만 이해하지 않아도 되는 무엇인가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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